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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 May 15. 2018

보른지구 골목 걸어보기

스노우볼을 사러가다

친구는 스페인에 가면 스노우볼을 기념품으로 사다 달라고 했다.

같이 일하는 직원이 헝가리에서 스노우볼을 사 왔대! 혹시 너무 비싸지 않으면 나도 하나만 부탁해.

모두들 지겹고 힘들게 일상을 보내다가 비상구처럼 여행지로 떠나는 거겠지. 그렇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의 들뜨고 흥분되었던 느낌을 무엇으로든 기억하고 싶은 게 틀림없다. 알록달록한 자석, 엽서, 스타벅스 머그컵 등 수집하는 기념품들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좌우된다. 내 친구의 취향은 스노우볼이었구나. 기념품은커녕 내 얼굴이 박힌 사진 한 장 남겨오지 않는 나에게는 약간 생소한 부탁이었다.

피카소 미술관

여행 첫날 갔던 피카소 미술관이 위치한 보른지구에 기념품 가게가 있었기에 이 곳을 다시 찾기로 했다. 

북적거리는 미술관 부근에는 엽서와 열쇠고리 등을 파는 조그마한 기념품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기념품 가게의 진열대에는 내가 찾는 스노우볼도 나란히 놓여있었다. 비싸고 정교한 것을 살 수는 없더라도 엉성함 속에서도 예쁜 스노우볼을 찾아보기로 했다.


동그란 유리 속 물에 잠긴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보였다. 약간의 디테일 차이가 있었지만 어떤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생략한 나머지 대성당이 마치 네 개의 새우깡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국 대성당이 그나마 정교하고 받침대에는 구엘공원의 도마뱀까지 그려진, 최대한 바르셀로나의 많은 것을 표현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 스노우볼로 낙점. 며칠 전 실제 대성당의 모습을 보고 온 터라 내 안의 기준이 더더욱 까다롭게 바뀐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덜 새우깡스럽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스노우볼
o가 하나 빠진 것일까?

기념품 가게를 지나 구불구불한 골목길 안쪽을 걷다 보면 늘어서 있는 청년들의 공방과 스튜디오, 편집샵 등을 구경할 수 있다. 관광으로 유명한 여느 거리처럼 호객행위나 시끌 거리는 소음 없이 조용한 가운데 저마다 자신의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차분한 보른지구의 분위기를 반하지 않으면서도 가게 주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간판과 디스플레이들을 보고 있자면 넋을 놓고 무작정 시간을 보내고 싶어 진다.

차분한 색의 키가 큰 건물들 사이 좁은 골목을 미로처럼 헤집고 다니다 보면 덜 들어오는 빛 때문인지 나른한 느낌이 들곤 한다. 밤이 되면 전구가 켜지고 은은한 전구빛들은 이 골목을 한 층 더 나른하게 만든다.


이렇게 마음에 들어서 이틀이나 가놓고 산 것은 고작 친구를 위한 스노우볼 하나라니.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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