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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ip Lee Jul 10. 2020

10분이 1시간 같았던 길고 길었던 운전길

내가 꿈을 포기했던 그날 이야기

“저희 출판사에서 이번에 편집부 모집하는데, 한번 지원해 보세요.”     

일하고 있는데, SNS 메시지가 왔다. 출판사에 다니는 SNS친구로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는 분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설렜다. 그 메시지는 우물에 빠진 내게 하늘로부터 내려온 동아줄 같았다.

 

문구점을 운영하는 나는 마음속에 숨겨진 꿈이 있었다. 바로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몇 번 출판사에 지원했었지만, 매번 떨어졌다. 이제 꿈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새로운 희망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분은 준비해야 할 서류와 면접 일정을 알려주셨다. 자신이 편집팀장이고 같이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이니 특별한 문제 없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학기 초라 정신없고 바쁠 때였지만, 내 마음은 온통 출판사에 가 있었다. 40대를 1년 앞둔, 39세의 나는 “드디어 내 꿈을 펼칠 수 있겠구나.” 하며 휘파람을 부르며 면접을 준비했다. 


면접은 바로 이틀 후였다. 살고 있는 대전에서 일산의 출판사까지 가야 했다. 아침 9시 면접이라 좀 힘들어도 운전해서 가기로 결정했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다. 3시간이나 되는 긴 시간이었지만, 30분 만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합격하면 누구에게 먼저 알릴까?’, ‘제일 먼저 어떤 책을 만들까?’, ‘거리가 먼데 이사는 어디로 해야 할까?’... 


나는 이미 합격한 듯,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치고 있었다.


드디어 면접이 시작되었다. 내게 메시지를 준 편집장님과 디자인팀장님, 마케팅팀장님, 그리고 다른 편집장님 총 네 분이 면접을 진행했다. 네 분이 돌아가며 질문했고, 나는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질문의 답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분석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을지 설명했다. 요즘 출판시장의 흐름도 이야기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웬만큼 쓸 수 있다는 편집자의 기본 조건도 당연히 덧붙였다. 한 시간의 면접이 별 무리 없이 끝났다.


한숨 돌리고, 사장님과의 추가 면접이 이어졌다. 사장님은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계셨고, 키도 컸다. 마치 상장기업의 CEO 같았다. 차가운 느낌도 들어 왠지 긴장되었다.


“책을 그동안 만들었던 경험은?”, “책을 1년간 몇 권을 만들 수 있나요?”, “책을 쓸만한 예비저자를 많이 알고 있나요?”...


질문로봇처럼 그분은 연이어 질문하셨다. 편집자에게 물을 수 있는 제일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출판 쪽에 경험이 미천한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얼버무리며 답을 하기에 바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무림고수의 사정없이 내리치는 공격에 아무것도 방어하지 못하는 풋내기 수련자가 나의 모습이었다. 사장님은 이후에도 몇 가지 더 질문하셨고, 나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완패였다.


면접을 다 마친 후, 편집팀장이 사장님과의 면접에서 무슨 일 있었냐며 위로해 주었다. 아쉬워하며 결과를 알려주었다. 불합격. 예상했기에 담담했다. 예전에도 출판사 면접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으니까. 


세 시간을 다시 운전해서 내려갔다. 십 분이 한 시간 같았다. 길은 왜 이리 막히는지... 핸들을 잡고 정처 없이 내려가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떨어진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어떤 회사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서글펐다. 주책스러운 눈물이 핑 돌았다. 하긴 적지 않은 나이의 나를 받아줄 곳이 어디 있겠나... 특별한 재능과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력을 보장할 수 있는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이를 이렇게 먹을 동안 그동안 뭐하고 살아왔을까. 결과를 함께 손 모아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어린아이에게도 부끄러웠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출판사에 들어가 책을 만드는 꿈은 자연스레 접었다. 아니, 접혔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나는 계속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달라진 점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책의 서평도 쓰고, 삶의 소소한 일상도 적는다.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다. 


만약 출판사에 입사했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뭐라고 말하긴 힘들다. 그렇지만 그때의 철저한 실패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것은 분명하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하지 않나. 새로운 꿈도 생겼다.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그 꿈을 생각하니 매일 똑같은 지리멸렬한 일상에도 장미꽃이 핀다. 


가끔 그때 일이 떠오른다. 면접 후 세 시간의 길고 긴 운전. 아직도 그 기억이 떠오르면 힘 빠지고 괜스레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렇지만 예전만큼 씁쓸하진 않다. 그때 역시 인생의 귀중한 부분이었음을 이젠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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