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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ip Lee Dec 31. 20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이 세상 모든 토니에게

넷플릭스 드라마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을 보고

인류는 역병이야.
우린 역겹고 자기애에 쩐 이기적인 기생충이고 
우리가 없어야 세상이 더 나아지지.
자살은 만인의 도덕적 의무야.     

난 지금이라도 기꺼이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릴 거야.     


처음 본 사람에게 아무런 표정 없이 이런 말을 내뱉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같이 일하게 된 부사수에게...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험한 말을 일삼는다. 그의 이름은 토니. 조그만 지역 신문사의 기자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뒤집어쓴 듯, 그의 얼굴은 항상 침울하고 뾰로통하다. 그와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독설을 항상 들어야만 한다.      


집 앞에서 만난 우체부에게 내게 편지를 주지 말고, 굳이 집의 우체통에 집어넣으라며 쏘아붙인다. 친척이자 상사인 편집장 맷에게도 항상 딴죽을 건다. “아무도 관심 없는 무료 신문을 뿌리잖아!”라면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동료 레니도 독설을 피하진 못한다. 매일 먹는 것만 생각하냐는 비아냥과 함께.       



그가 이렇게 입에 걸레를 물고 다니게 된 이유는 있다. 바로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미소를 띠고 평안을 누리는 때는 아내의 생전 영상을 찾아볼 때뿐이다. 영상을 보며 아내와 함께했던, 이제는 누릴 수 없는 순간을 그린다. 비로소 그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운다.      


아내가 없는 세상에 우두커니 서 있는 토니. 고통스러운 세상을 얼른 등지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다.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는 행동과 욕설은 그에게 필수다.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토니를 담담히 그린다. 토니에게는 치매를 앓고 계신 아버지와 매일 밥을 줘야 하는 개뿐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나이의 독설이 반갑지 않았다. 아니, 외려 내게 향하는 화살 같아 부담스러웠다. 쉬고 즐기러 보는 드라마에서 이런 느낌을 받아야 하다니... 계속되는 토니의 푸념을 들으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앗! 토니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 아닌가?     


결국 사람이다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토니. 그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로 다가왔다. 나의 이야기로 여겨졌다.  

2020년 우리는 너무도 힘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19로 우리의 일상은 허물어졌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마음의 거리마저 저만큼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뿐인가. 왠지 나만 불행하다. 다른 사람들은 하하 웃으며 잘 사는데, 나만 불행 열차를 탄 것 같다. 언제 내릴지 모르고 기약 없이 뱅뱅 돌고 있다. 금수저, 아니 흙수저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수저조차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토니의 불만이 이해된다. 그의 독설이, 그의 푸념이, 그의 욕설이,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이런 토니에게 구원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아내를 잊을만한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할 액수의 복권에 당첨되어 돈으로 지난한 현실을 갚아준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버지를 제 몸과 같이 간호해 주는 간호사 에마, 항상 자살을 말하는 토니를 염려해 집을 방문하는 처남 맷이 있었다. 잠깐씩이지만 제 정신이 돌아와 토니와의 추억을 말하는 아버지가 있었고, 외로운 토니에게 말벗이 되어준 우체부와 성노동자 다프니도 있었다. 아내의 무덤 바로 옆에 남편을 묻은 늙은 앤도 있었다. 앤은 토니에게 조언한다.     


“토니는 좋은 사람이니까
자살 안 하면 좋겠어요.
너무 아까울 거야.
사는 게 달갑지 않더라도
세상에 도움은 될 수 있죠.
포기하지 말아요.”     



사람들 덕분에 조금씩 그의 삶은 변한다. 하룻밤에 180도 성자로 바뀌는 극적인 변화는 없지만, 서서히 그의 삶은 주위의 사람들에 의해 좋은 영향을 받는다.

      

항상 핀잔을 주던 우체부에게 깜짝 선물을 주기도 하고, 에마에게 호감을 느껴 데이트를 신청하기도 한다. 독설만 내뿜던 맷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부사수에게도 진정으로 생일 축하를 건넨다.      


과연 토니는 불행했던 과거를 던져버리고, 이런 이타적인 삶을 계속 살 수 있을까?     


의미 없는 사람은 없다     


토니와 편집장 맷의 일터인 조그만 지역신문사. 이 신문사는 항상 재정난에 시달려 언제 문 닫을 줄 모른다. 그렇지만, ‘지역’에서 그 신문사는 중앙지 이상이었다. 매일 지역 신문의 1면에 나기 위해 다양한 제보가 들어온다. 물론, 대부분 자기가 직접 제보한 것이다.      


예를 들면, 콧구멍으로 리코더를 분다는 아이, 자고 일어나서 배운 적 없는 중국어를 했다는 여인, 다섯 번이나 같은 생일 카드를 받았다던 남성, 보톡스를 맞고 주름에 필러도 넣은 성형 중독에 걸린 여인, 자신을 8세 여학생으로 인식한 50세 남성...     


별 볼 일 없고, 오히려 누군가 흉이나 보지 않으면 다행인 이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여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신문에 자신의 이야기가 실려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토니와 주위 사람들의 갈등과 봉합을 그린 것이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의 주된 이야기다. 그렇지만 곳곳에 이런 다채로운 조연들은 드라마를 더욱 풍성하게 해 준다. 토니의 기행과 욕설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소스가 된다. ‘저런 게 신문에 실리겠어’라며 깔깔 웃다가 문득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나도 저렇게 별 볼 일 없는데...     


TV와 신문에 계속 오르내리는 스타는 아니더라도, SNS에서 수십 수백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인플루언서는 아니더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음을 드라마의 조연들은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든지 세상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섯 번이나 같은 생일 카드를 받았다던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아내한테 가서 말한다오
그러면 기억이 나지
나누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야.
가라앉을 때도 있지만
인생이 이렇게 재밌는 일을 선물해주잖소.
한탄만 할 수 없지.
살아내야 해.”     


이 대사가 가슴 한구석에 오래 남았다. 어쩌면 드라마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내용이 아닐까?


토니처럼 항상 ‘나 죽을래’를 외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매일 아침 눈꺼풀을 들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비극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한마디로 삶이 나를 속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할아버지의 말을 곱씹어보자면, 일단 살아내야 할 뿐이다. 토니는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가져간 부조리한 세상에서 불평하고, 욕 하고, 분노했다. 그렇지만, 죽진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냈다. 그때 조금씩 구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도 멸시했던, 별 볼 일 없었던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      


2020년 많이 힘들고 외롭고 지쳤다. 새해를 맞이하는 게 즐겁지 않다. 기대가 안 된다. 한숨부터 쉬어진다. 어찌 됐든 또 1년이 다가온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일단 살아가자. 어떻게든 살아갔을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발견할지 모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함께 살아가자. 비참한 토니 옆에는 그를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살아갈 때 혼자보다는 덜 외롭고, 덜 지치고, 덜 힘들지 않을까.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의 불행했던 토니에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토니에게 이 말을 꼭 건네고 싶다.       


“우리, 함께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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