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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Insight

<503호 열차>

Book Insight #8 / 참혹한 우리 과거를 동화로

by Philip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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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호 열차(허혜란 / 샘터)>


사샤는 아빠와 헤어져 고향을 떠난다. 그의 가족과 이웃들, 친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열차에 탑승한다. 이들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가게 된다. 이들에겐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까?


『503호 열차』는 1930년대 구소련이 행한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특이한 것은 어려운 역사서나 소설이 아니라 ‘동화’라는 점이다. 보통 어린이들이 많이 읽는 동화책. 동화로 이렇게 무거운 소재를 담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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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걱정은 기우였다. 이 동화는 사샤의 관점으로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아픔을 담담히 묘사한다. 오히려 쉬운 문체와 간결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안한 얼굴로 좁은 객차 안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어디론가 실려 가는 소나 돼지 같아요. (11쪽)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던 사람들. 불안에 떨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503호 열차에 강제탑승한 그들.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노역이었다. 굶주리는 이들도, 아픈 이들도, 횡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작가의 시선은 절망에만 머물지 않는다. 찬 땅에 피어나는 꽃처럼 희망의 모습도 그린다. 열차 안에서 그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혼도 한다. 죽음이라는 아픔도 있지만 그속에서 더욱 서로를 보듬는다.


아파도 함께 있는 것이 좋으니까요. (34쪽)


눈물 속에서 쉼없이 달린 열차는 멈춘다. 그들을 하릴없이 남겨둔 채 떠난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들이 같이 노래 부르는 장면으로 동화는 끝난다.


이 동화는 <제5회 정채봉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정찬주 작가는 이 작품이 정채봉의 문학 정신이 잘 투영됐다고 평가한다. 정채봉 작가 역시 ‘현실의 문제의식과 집요하게 대결하면서 끝내는 인간성의 승리를 드러’(89쪽)냈던 작가였기에 『503호 열차』는 당연한 수상이었으리라.


좋은 책의 기준은 얼마나 오래 남느냐일 것이다. 동화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중후한 인생을 보여주는 책, 『503호 열차』. 오래도록 그들의 눈물이 기억될 것 같고, 노랫소리가 들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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