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사전 20.신호등 / 유치원 때 이미 배운 것"
또 그때가 됐다.
천천히 운전하던 나. 갑자기 악셀 페달을 질끈 밟는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속도를 자랑하는 카레이서가 되고,
차가 다니는 도로는 아우토반이 된다.
이것은 바로 신호등 노란불일 때의 나의 모습이다.
무사히(?) 건넜을 때 미처 건너지 못한 차들을 바라보는 나는 그저 흐뭇할 뿐.
다시 서행모드로 바꾸고 유유히 자리를 뜬다.
노란불은 내게 있어 파란불과 동의어였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조금만 더 빨리 악셀을 밟으면
괜히 거리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고,
게다가 목적지까지 더 빨리 도착하니 일석이조 아닌가.
노란불, 어느 때처럼 질끈 악셀을 밟았다.
역시나 무사히 통과.
문제는 여섯 살 먹은 아들이 같이 타고 있던 것.
“아빠, 빨간불인데 왜 가?”
질문이 날카롭게 머리에 박힌다.
“아니, 노란불은 건너도 되는 거야. 음...”
얼버무렸지만, 내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다.
길을 건널 때마다 오른손을 번쩍 들고 건너는 아이.
길에 떨어진 휴지만 보면, “여기다 버리면 안 되는데.” 하는 아이.
이토록 준법정신이 철저한 아이에게 현행범으로 찍혔으니 뭐라고 할말이 없다.
생각해 보면, 빨간불에 정차할 때 할 게 많다.
잠깐 두 팔을 올려 뭉친 근육을 풀 수도 있고, 물도 잠깐 마실 수 있다.
숨도 깊이 내쉬며, 긴장도 완화할 수도 있다.
그뿐인가.
요즘같이 좋은 날씨에 창밖의 하늘, 구름, 서서히 변해가는 나뭇잎도 볼 수 있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라고 했나.
신호등 한번 제대로 지켜봐야겠다.
유치원 때 이미 배운 것 아닌가.
이젠 노란불일 때는 악셀 대신 브레이크 페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