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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 Dec 08. 2024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지만

24.12.07 탄핵 집회에 다녀와서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소년이 온다(한강) 중-


내게 아물지 않는 기억은 백남기 농민이 시위 중에 온몸으로 경찰의 물대포를 맞다 쓰러진 장면이다. 내 나이 21살이었다. 어릴 때 배운 518 광주가, 1212 서울이 떠올랐다. 이게 2015년에 일어나는 맞다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던가.


박근혜 탄핵 촉구 집회에 나갈 때 나는 그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 장면이 내 머릿속에서 흐릿해질 충분한 시간이 되지 않기도 했지만, 그 기억은 한강의 말처럼 "아물지 않는,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모든 것이 마모될" 그런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데일리포스트


시위에 가는 길에 두려움과 긴장 탓에 어깨가 아파왔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두려움에, 낯섦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옆 사람이 종이컵 끼운 초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들고 한 손에는 피켓을 들었다.


그 이후로는 시위가 두렵지 않아졌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 아물지 않은 기억은 백남기 농민이 온몸으로 물대포를 맞던 장면과 몇 년 후 그의 딸 백도라지씨가 눈물을 흘리며 경찰과 정부의 책임을 묻던 기억이다.


 

총칼로 무너뜨릴 수 없는 민주시민의 의지

12월 3일 밤, 윤석열은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말이 된다고? 믿을 수 없어 바로 국회로 뛰어갔다. 가는 길에 국회로 가는 헬기를 몇 대나 봤고 장갑차가, 탱크가 거리에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아물지 않은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시 무서웠다.


국회 앞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 혼비백산이었다. 특전사들, 경찰들, 기자들에, 성난 국민들. 군인의 국회 진입을 온몸으로 막은 시민들. 경찰이 방패로 우리를 밀어낼 때 온몸이 아프고 머리칼이 다 뜯겼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 장면이다.


방패로 시민을 미는 경찰, 중무장을 하고 시민들에게 화를 내는 군인들 앞에서 당차게 소리쳤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같이 간 친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내가 맞은 것도 아니고 본 거 가지고 이렇게 10년이 되도록 겁을 먹게 하는데 광주에 있던 분들, 서울의 봄을 겪은 분들은 이번 비상계엄이 얼마나 섬뜩한 일이었을까. 그럼에도 그 한 밤중에 뛰쳐나오게 한 건 뭐였을까.


숙명여대 법학과 홍성수 교수님은 이 장면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중략)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총칼로 무너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중략) 이번에는 다행히 부상자 한 명 없이 민주주의가 살아있음을 또 한 번 입증했다."



촛불과 함께 빛난 응원봉, 청년 여성들의 화음

12월 7일, 국회 앞에 모인 국민은 100만 명이었다. (경찰 추산 2만 명이라고 하는데 제가 바로 3일 전에 두아리파 콘서트 2만 명 관중을 보고 왔거든요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번 집회에서 놀란 것은 형형색색의 응원봉이었다. 갑자기 집회에 무슨 응원봉을? 싶을 수도 있다. 2016년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이에 성난 우리 휀걸들이 친히 꺼지지 않는 led 응원봉을 들고 온 것이다.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떼창


응원봉을 흔들며 에스파 위플래시에 맞춰 "퇴진 퇴진 윤석열 퇴진"을 외치던 모습, kpop을 떼창하던 모습을 보면서 9년 전 그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던 장면을 마치 생경한 기억처럼 떠올렸다.  아 이게 세상이 변하는 모습이구나 싶어 눈물이 맺혔다.


이제는 집회가 두려운 일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를 향한 연대와 존중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시민들의 의지와 양심을 보는 자리가 되었다.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응원봉을 한 자리에서 보고 있자니, 이런 게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말한 '이질적 공중'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이리스 영은 "보편적 공공성"이 사회적 차이를 무시하고 획일적 기준을 강요한다고 비판한다. 이에 반해, ‘이질적 공중’은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며 다양한 집단이 공적 영역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공론장을 뜻한다. <차이의 정치와 정의> 참고



수많은 응원봉이 의미하는 것은 청년 여성이 이렇게나 많이 집회에 모였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내 눈대중으로 봤을 때 집회에 참여한 절반이 청년 여성이었다. 하지만 이번 집회에서만 이런 것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청년 여성들은 광장에 있었다. 2017년 박근혜 탄핵 집회에도, 2018년 미투 시위 때도, 2024년 오늘도 청년 여성은 숨지 않았고 앞장서서 달려 나왔다. 그런데도 항상 새롭게 '발견'되고 여성이 아닌 그냥 청년으로, 세대로 가려져왔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응원봉까지 가릴 수 없을 것이다.


 12.7 윤석열 탄핵 집회 중 소녀시대 <다만세> 떼창 영상 댓글로 마침말을 갈음한다.



https://youtu.be/nu7CbEsZ_Pk?si=PuaIuow5BEWNf2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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