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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걸그룹

투애니원부터 아이브까지

by 연정

어느 순간부터 내 플레이리스트에 여자 아이돌 노래가 하나 둘 늘어났다. 거기에 더해 이전에는 좀처럼 가지 않던 코인노래방까지 가고 있다. 아이돌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내가 언제부터, 왜 이렇게 K-pop 걸그룹을 좋아하게 됐는지 고민해 봤다.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대중문화의 변화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문학, 영화, 드라마, 예능, 유튜브 할 거 없이 분명히 변했다. 더 이상 사랑에 목매는 여자나 허영심 많은 여자가 유머소재도 필수 등장 인물도 아니다.

(필수 등장인물이었지만 제대로 된 이름은 나오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다. 타짜의 '예림이'와 같이 본명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터.)

*페미니즘 리부트에 대한 설명은 김보명(2018)의 논문과 손희정(2017)의 책 <페미니즘 리부트> 참고


이 변화들 중 하나는 여자 아이돌 노래 가사가 변했다는 점이다. 바람펴도 봐주는 가사(다비치-사랑과전쟁), ‘오빠’에 대한 사랑 고백(소녀시대-oh!), 뜬금없이 '오빠'를 외치는 노래(블랙핑크-붐바야)를 듣고 자란 나에게 4세대, 5세대 걸그룹의 노래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걸그룹의 시작: 투애니원

짧은 하의와 딱 붙는 옷을 입고 여성스러움, 섹시함 등을 보여주던 걸그룹 속에서 투애니원의 등장은 독보적이었다.


2009년 데뷔한 투애니원은 기존 걸그룹들이 주로 강조했던 청순함, 귀여움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투애니원의 노래에 사랑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가사가 자신감, 자기 확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사랑을 주제로 노래할 때도 미련 없이 못난 남자를 떠나는 가사가 대부분이다.(I don't care, Go away)

물론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곡들은 당당함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노래들이다. <내가 제일 잘 나가>, <fire>, <can't novody>가 대표적인 예시 곡이다. 기존 걸그룹들과 차별화된 강렬한 퍼포먼스와 당당한 가사로 주목받으며,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데뷔 초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도 '걸크러쉬의 선구자'라고 평가되고 있다.



투애니원이 활동을 멈춘 뒤 다시 케이팝은 사랑에 잠식되는가 싶었다. 흔히 3세대 아이돌로 분류되는 2014~2020년 걸그룹들은 청순, 귀여움, 섹시 등 온갖 콘셉트로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고 가사와 안무에서도 이를 뒷받침했다.

(대중들이 투애니원의 컴백을 그토록 염원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프로듀스 101이 순종적이고 청순한 소녀들을 내세워 국민들에게 프로듀싱 간접 체험까지 시키고 있었다. 이후 프로듀스 101의 시즌2, 이른바 남자버전이 나오면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대중들이 시즌별로 다른 카메라 구도(소녀들은 다리와 치마를 보여주고 소년들은 전체 앵글을 비춰줌 등), 노래 가사의 차이(pick me, 나야 나)가 보여주는 젠더고정관념 강화와 재생산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페미니즘 대중화가 있다. 2015년부터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이후 대중들은 페미니즘의 언어와 사고를 습득했다. 성차별에 대한 감각이 늘어난 것만큼이나 여성의 주체성, 주체적 여성에 대한 요구가 늘어났다.


이는 고스란히 미디어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여성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블랙 위도우, 겨울왕국 2, 벌새, 82년생 김지영 등)이 개봉하기 시작했고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드라마를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들이 무엇을 소비하는지, 무엇을 소비하지 않는지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kpop 팬덤의 변화는 이들의 소비를 더 고채도로 보여준다. 페미니즘의 대중화는 트위터를 기반으로 전개됐다고 말해도 무방 할 텐데, 트위터를 통해 유지되는 문화를 하나 더 꼽으라면 팬덤 문화말고 무엇이 또 있을까. 트위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이돌 팬들은 페미니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이돌 팬덤은 대부분 1030 여성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아이돌 팬 이라는 두 정체성을 함께 갖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과 아이돌 팬덤은 활동 기반 플랫폼을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주체 역시 많은 부분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에 활동 성격이 닮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한 아이돌팬들은 팬덤 문화나 아이돌 활동의 여성혐오를 지적하는 실천들을 이어오고 있다(조은수.윤아영, 2020; 양인화, 2021).


소비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여성은 페미니즘적 실천으로서 성차별적인 콘텐츠를 더 이상 소비하지 않고, 미디어 제작자들은 이 변화를 빠르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걸그룹의 재탄생

최근에 발매된 걸그룹, 여자 솔로 노래들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 멋진 여성들과 이들의 노래를 이 노래만큼이나 멋지게 설명할 길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나열하기로 했다.


에스파의 <whiplash>는 <내가 제일 잘 나가>의 에스파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충격(whiplash)을 줄 만큼 coldest, changer 같은 존재라고 스스로 외치는 노래에 이 세상을 끝낼 전쟁(armageddon)과 폭발적인 성장(supernova)을 말하는 노래는 그 의미를 다 파악하기도 어렵다 (그냥 너무 멋있어서 파악하지 않고 냅다 듣고 부름 1일1닝닝합니다).


아이브의 <Attitude>와 <Rebel heart>는 마음이 찡하다. 프로듀서 48부터 아이브에 오기까지 그 어린 나이부터 말도 안 되는 수위와 양의 악플을 받아온 멤버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이 부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확신은 감동적이다 못해 미안하기까지 하다.


"네가 날 싫어해도 내가 널 좋아할 수도 있어 You’ll fall in love by the end of the song" (Attitude 중)

이 가사는 거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하다. (나에 대한) 사랑이 악을 이긴다는 것이 <attitude>의 주제일까.

<Rebel heart>는 "국민 프로듀서님들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며 허리가 꺾이도록 인사하던 소녀들이 자라서 'riotgirl'이 되어 나타난 것 같아 정말 감동적이다.


제니. 제니를 빼놓을 수 없다.

제니는 솔로 활동의 시작을 <Mantra>로 열었다. “This that pretty-girl mantra”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티저영상에서 주제를 찾을 수 있다. 제니가 말하는 예쁜 여자들의 수칙은 다음과 같다.

1.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2. 스스로를 사랑하기

3. 동물을 사랑하고 보호하기

4. 충분히 휴식하기

5. 스스로를 잘 대접하기

6.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기 (원할 때만)

이 노래는 남자 없이도 혼자 잘 사는 여성(Look at them Bonnies on the run)을 보여주고 여성들을 감정적인 존재로 상징하던 표현 “Drama”를 재치 있게 재전유했다는 점(Pretty girls don't do drama, 'less we wanna)했다.

*Hey, calm down. what a drama queen 같은 표현들을 생각하면 ‘drama’의 용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후 나온 <Extra L>는 여자들이 얼마나 큰 일을 하는지 보여주고, <Like Jennie>는 자기 확신과 자신의 멋짐을 노래한다. 노래 중간에 뜬금없이 "오빠"를 외치고, 간호사복을 입고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던 제니가 이렇게 다른 노래를 부르다니. 그동안 얼마나 이런 노래를 하고 싶었을까 잠시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2020년 'Lovesick Girls' 뮤직비디오에서 제니가 간호사 복장을 한 장면이 비판을 받자 YG는 해당 장면을 삭제하고 사과했다.



이 외에도 (여자)아이들 노래(Lion), 엔믹스(dash), 있지(스니커즈, 달라달라) 등 많은 걸그룹들이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도 더 확장되고 다양해질 것이다. 이런 노래를 듣고 자라는 소녀들이 만들어 갈 세상이 기대된다. 한국에 남아 있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제니의 빌보드 수상소감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싶다.


이 상은 꿈을 꾸고, 창조하며, 자신의 비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여성들에게 바치는 헌사입니다. 여성들은 정말 강한 존재이고, 우리가 함께할 때 서로를 더 높이 올려줄 수 있다고 믿어요.





이런 노래가 나오기까지 많은 실천들을 해준 트위터리안들께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덕질되길 기원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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