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관해 알려면 먼저 小學부터 읽어라
대학 2학년, 무슨 생각으로 선택했는지 모르겠으나 교양 과목으로 '윤리학개론'을 선택했다. 담당은 철학과 김○○ 교수였다. 그리 세지 않은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했다. 금테인지 은테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소 높은 도수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항상 짙은 은색 계통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와서 그런지 강의 분위기는 나름 세련됐고 내용은 흥미로웠다.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분이다. '상황윤리학'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설명할 때 뭔가 어둡던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대학에 입학한 1985년의 정치 상황은 청년들이 속으로만 품고 있던 정의감을 표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국민들은 두 번의 쿠테타로 30여 년을 넘게 유지해온 군부 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군사독재 정권은 높아진 시민의식을 따라오지 못했다. 내부의 모순으로 이미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민들은 프랑스나 미국처럼 유혈 혁명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에 차있었다. 다만 변혁기를 거치다 보니 청년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도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정치 제도의 모순이나 경제 구조의 불평등이 아니라 결국 사람에서 비롯된다. 전문가들이 문제에 대한 분석을 하고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나는 사람에 관해 알고 싶었다.
"교수님, 교양 과목으로 윤리학 개론을 수강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철학에 관해 알고 싶은데 어떻게 공부하면 될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과 죽음은 무엇인지, 이러한 거창한 주제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었다. 단지 살아가면서 보고 겪는 부조리는 왜 발생하는지 궁금했다. 욕구와 욕망, 욕심을 조금만 자제한다면 내가 사는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역사에서 많은 문제가 내부의 모순을 외부의 힘이 누를 때만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정쟁의 시작은 수준 높은 담론에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선이 썩는 것처럼 부패해가는 게 인간사였다. 철학 교수라면 이런 논제에 적절한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창으로 적의 가슴을!"
2학년 때 총학생회장 선거 운동을 하던 학우가 강의실에 들어와서 오른손을 쳐들면서 외친 말이다. 섬뜩했다. 적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죽창의 메타포는 무엇인가? 자신의 견해를 따르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했다. 의견이 다르면 설득하려고 대화해야 한다. 그는 대화보다는 빠른 방법을 찾았나보다. 공존하기보다는 타도하는 게 더 쉽다고 생각했나보다. 사람에 대해 이해하려기 보다는 이데올로기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성 같았다. 사람마다 생각은 같지 않다. 그래도 공동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양보와 배려는 필요하다. 오히려 공동악으로 치우치는 게 일반적인 현상으로 느껴졌다. 20대 초반에 맞닥뜨린 정신적 혼란이었다. 생각 정리가 안 되었다.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의 중심에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김교수의 강의는 특별했다. 처음으로 '분석철학'이라는 용어도 들었다. 김교수의 연구분야였다. 사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다. 그때 배워 알았다해도 지금은 기억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지금 위키피디아에서 읽어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김교수에게 물어보면 복잡하고 혼란하던 생각이 정리되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은 있었다.
"철학에 관심이 있으면 『소학(小學)』을 읽는 것부터 시작해보게.
그리고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도 읽고."
그때 기억으로는 철학 공부를 하려면 소학을 입문서로 삼아 읽으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런데 두 권 모두 제대로 읽지 않았다. 읽는 재미가 없었다. 재미가 없으니 끝까지 읽을 동기가 약했다. 아무튼 철학책은 어려웠다. 정치 상황에 관한 인식이 생기면서 근현대사 관련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왜 사람들은 공동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독선적으로 살아갈까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어쨌든 역사책이든 철학책이든 문학책이든 이때부터 인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을 대츨해서 보기 시작했다. 시대 배경이 그랬는지 한국의 스무살 청년은 이렇게 文史哲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