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의 시작

생각, 사유, 사춘기, 미래, 꿈, 비전, 부조리, 정의

by 브레인튜너

혼자 노는 걸 좋아했다.


어릴 때 비누곽으로 자동차 놀이를 했다. 비 온 후 장독대에 고인물을 자동차로 지나치면 흔적이 남았다. 직선으로 이어지다가 커브라도 틀 참이면 곡선으로 이어지는 자욱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상상력이라는 걸 발휘한 게 그때가 처음이었나 보다. 희미해지는 기억이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내가 기억하는 생각의 시작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거라고 한다. 집에 있는 강아지를 보면, 생각하기보다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걸 알 수 있다. 순치된 동물은 감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칭찬하면 좋아하고 혼을 내면 눈치를 본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법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튼 지금까지 동물이 생각을 한다는 관찰이나 보고가 없는 걸 보면 인간만이 사유를 누리는 존재다.


내게는 발을 딛고 사는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가 하나 있다. 바로 마음속에 있는 세상이다. 다른 이들도 똑같이 갖고 있다. 다만 의식하지 않기도 하며, 굳이 정의하지 않기 때문에 무감각하게 살뿐이다. 사유界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아마 중학교 3학년 시절부터 인식하기 시작한 나의 우주다. 그때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된 동기는 진로 때문이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를 생각했다. 아마 고만할 때 누구나 하는 고민이었을 거다.


머리가 크면서 사유계의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불확실한 미래, 살기 좋은 사회, 인간 존재론, 죽음, 운명, 인생의 의미, 인간관계, 진리 추구, 철학, 역사의 반복 등 혈기 왕성할 때 생각할 수 있는 주제였다. 특히 80년 대 초반은 핵전쟁의 공포와 같은 실존적인 위협과 지구의 종말 같은 이교도적인 염세론이 판을 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 지난날의 에피소드로만 기억할 뿐이다.


불의한 정치, 부조리한 역사, 부패한 사회를 알아가면서 인간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다. 왜 중요한 순간에 존경받는 정치인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역사는 항상 악한 자들이 주도하는지, 사람은 왜 이기적인지, 나라면 잘할 것 같은데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띄었다.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나보다 먼저 산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책은 많은 내용을 알게 해 주었다.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혹시라도 좋지 않은 책인데 잘못해서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어쩔까 하는 엉뚱한 걱정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사유계의 영역을 조금씩 늘렸다.


생각이 많았다. 지금도 많다. 청년 시절에는 새로운 생각이 머리로 들어오는 족족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50줄이 넘어선 지금은 쉽게 열 받지 않는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이치를 깨달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른 사람이 강요하는 체계를 받아들일 의향도 없다. 소크라테스의 말로 기억하는데 청소년기부터 내 생각의 방향을 잡아준 지침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네 갈 길을 가라.


여전히 혼자 노는 걸 좋아한다.


익숙한 것들은 그 무엇과도 멀리하고 싶다. 아니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그동안 유물론적 사고에 충실했다. 그렇다고 앞으로 이상주의자로 살겠다는 뜻은 아니다. 진정한 사유가 무엇인지 배우며 세워가려 한다. 나는 동물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따뜻한 햇볕과 부드러운 미풍을 누리며, 밤에는 고요한 풀벌레의 노래를 들으며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는 삶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