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워터맨 파카 몽블랑 필기도구 생각정리 사유
만년필은 고급지다.
보통의 필기도구보다 값이 나가서 고급스러운 건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어 필기할 때 왠지 도움이 되는 느낌이 든다. 볼펜으로 적을 때는 그저 받아쓰기 같은데, 만년필은 한정된 사유思惟의 영역을 넘어서서 뭔가를 알려주는 전조前兆를 보여주는 듯하다. 통찰력洞察力을 강화해 준다고나 할까. 고급지다고 하는 이유다.
중학교 시절, 검정, 파랑, 초록색 모나미인가 파일롯트 잉크를 나무나 플라스틱 펜대에 꽂힌 펜촉을 살짝 담가서 공책에 글을 쓰면 느낌이 너무 좋았다. 펜 끝으로 빈 공간을 채울 때마다 나는 사각사각한 소리는 새로운 지식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아버지의 옛날 노트에서 본 필체를 흉내 내며 쓰는 일은 재미있기까지 했고,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겼다. 후에 필기체 연습장에 한 칸 두 칸씩 채우며 필체의 모양새를 잡았다.
사회생활에 치여 한동안 잊고 있던 만년필을 다시 접한 건 2000년 2월, 직장 선배가 준 선물 때문이었다. 한 선배는 워터맨 만년필을, 다른 한 선배는 몽블랑 볼펜을 이직移職 기념으로 내게 주었다. 그 이후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선물로 받은 만년필과 볼펜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또 한동안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실용성이나 즉시성이 필요한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효율적이지 못했던 터였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지낸 지 10년이 되었다. 일과 관련하여 상담이나 자료 정리가 필요할 때는 볼펜을 사용한다. 뭔가 생각을 정리하거나 창의적인 게 필요한 일,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에는 가능하면 만년필을 사용한다. 남색 워터맨은 블랙블루, 붉은색 워터맨은 블루, 노란 파카는 그린 칼라로 잉크를 채운다. 주로 블랙블루나 블루 칼라로 적고, 주말에 일주일 노트한 내용을 리뷰하면서는 그린 칼라로 첨삭하거나 rephrase 한다. 1주나 2주에 한 번씩 잉크를 채우거나 청소하는 일은 번거롭지 않다. 수고하는 것보다 유익의 총합이 훨씬 더한데 그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도 오전 내내 만년필로 끄적댈 거다. 오후부터는 상담 일정이라 볼펜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