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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200자 생각

1200자 단상(20250326) - 기억과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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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레인튜너

오전에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분당으로 운전했다.


출퇴근을 포함해 거의 20년을 다녔던 길이다. 가끔 광역버스를 타고 강남이나 판교에 갈 때도 이 길을 지난다. 운전할 때는 꼭꼭 숨어있던 풍경이, 버스를 타면 창밖에 펼쳐진다. 마치 처음 본 것처럼. 그동안 바깥 경치는 많이 변했다. 예전에 없던 건물들이 새롭게 들어섰고, 풀과 나무만 있던 자리에는 신축 아파트가 많이 조성됐다. 기억 속 이미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태어난 이후, 지금 사는 동네에서 반경 500m를 벗어난 적이 없다. 주변에서만 7번을 이사했다. 젊을 때는 익숙한 것을 버리는 걸 잘 못했다. 회사가 있던 서울, 의왕이나 수원으로 이사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태어난 동네에 계속 살았다. 지역의 재개발은 얘기가 나온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본격화됐다. 졸업한 초등학교만 남겨 놓은 채 모든 건물은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보냈던 기억과 추억은 중장의 평탄화 작업과 함께 다 사라졌다.


10여 년 전부터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한 치의 틀림이 없이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했다. 기억은 인지의 영역이다. 종이가 오래되면 바래듯이 기억도 부식되는 것일까, 거리가 멀어지면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시간의 지배력이 약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 짝지와 대화하다 보면 내 기억이 왜곡되었다는 지적을 종종 받는다. 처음에는 부정했으나, 최근에는 기억이 조금씩 어긋나는 점을 인정한다.


추억은 좀 다르다. 오감으로 체감하고 느낀 경험은 감성과 정서로 스며니 기억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후각과 미각으로 기억하는 잔향殘香, 기쁨과 슬픔으로 마음에 새겨진 흔적, 몸짓과 말투에서 엿보이는 부모의 닮은꼴 등... 추억은 왜곡되기보다는 기화氣化한다. 컵에 담아 놓은 물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줄어들지만, 본질은 그대로인 것과 같다.


기억은 역량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약화되는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다. 추억은 가슴에 묻힌 감정이다 보니 잃고 싶지 않다. 사람은 삼시세끼뿐만 아니라 추억을 먹어야 사람처럼 살아갈 힘과 의지가 다져지기 때문일 거다. 지금은 엄마 김치와 비슷한 맛을 느끼기만 해도 행복을 느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먹은 게 34년 전이니... 50여 년 전 아버지가 신포동에서 사다 준 샌드위치, 양파와 치즈가 어울린 맛은 일품이었다. 여태껏 그 맛을 다시 보지 못하고 있다.


말이 추억이지, 사실은 그리움이다.


더 오래 함께하지 못한 한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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