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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200자 생각

1200자 단상(20250328) - 풍진 세상

풍진세상 난세 인생 광야 고통 고난 인생무상

by 브레인튜너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어릴 때는 풍진 세상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불렀다. 곡조 자체는 염세적인 비탄조 같은데 후렴구로 들어서면 음이 높아지면서 희망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지금도 당최 알 수 없는 노래다. 절망의 노래인지, 희망의 노래인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풍진風塵의 의미를 알게 됐다. 사람의 인생이나, 세상의 일을 이처럼 함축한 단어가 있을까 한다.

풍진(風 바람 풍 塵티끌 진)
①바람에 날리는 티끌
②세상에서 일어나는 어지러운 일이나 시련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라는 게 눈곱 만큼도 없는 어두운 시대였다. 정조대왕 사후, 왕실의 외척과 세도가들의 전횡에 더해 부패한 관리들의 무도함으로 조선은 멸망의 나락으로 가고 있었다. 힘없는 백성의 삶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군흉群凶은 자기들의 배만 채웠다. 백성은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굶주림, 세금과 부역으로 영혼까지 피폐해졌다. 신이 부여한 인권은 모래가 섞인 잡곡 따위보다도 하찮게 여겨졌다.


결국 배운 놈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면서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대가 시작됐다. 나라를 빼앗긴 울분, 식민지 노예로서 감내해야 했던 크나 큰 고통과 상처... 학살, 수탈, 강제 징용, 강제 징병으로 대표되는 자기 결정권이 없는 인생...


해방 후에도 이러한 아픔과 괴로움은 끝나지 않았다. 허리가 잘린 채로 분단된 조국, 실체가 없는 이념의 대립, 동족상잔의 비극, 군사독재의 폐해 등 지난持難하게 얽매어 있는 고단한 삶... 그래도 우리에게는 이 모든 어려움을 한恨으로 정의하고 희망希望으로 풀어가는 DNA가 있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 지난 200여 년의 역사는, 이 나라에 사는 사람 누구에게나 고스란히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어제 아침, 외숙모가 소천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렸을 때 외삼촌 가족과 한 지붕 아래서 일가처럼 살았다. 부모님이 돌아간 후, 명절이면 외삼촌 댁에서 보냈었다. 근 10여가깝게 중병으로 고생했다. 2주 전 병문안 갔을 때만 해도 조금 더 살 수 있겠다 싶었다. 본인은 고통스러웠겠지만, 손에 힘도 있었고, 목소리에서 강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생에서의 삶은 어제 새벽에 마침표를 찍었다. 영정 사진을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그저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 때문에...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데 이 노래가 계속 머리속에서 맴돈다.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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