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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23. 2016

(1분소설)미련

진짜 좋아했던 걸까.

"안녕? 오래 기다렸지?"


응. 딱 10년 하고 부족한 3개월 만이지. 하지만 아니. 난 바로 어제처럼 생생해.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똑같은 얼굴로 나타났다. 긴장하면 앞머리를 만지는 버릇도 그대로였다.


"잘 지냈어?"

"응, 뭐 그냥 그냥 그렇게 지냈지. 너는? 아직도 그 동네에 살아? 일은? 너 그 회사 다니기 힘들다고 그랬잖아."

"야야, 일단 뭐 좀 마시면서 말하자. 내가 살께."

"어어어. 아니야. 내가 시킬게. 너 뭐? 맨날 마시던 거 마시지?"

"응? 응. 너 은근 기억력 좋다?"

"잊어버릴 수 있겠냐. 갔다 올게."


나도 모르게 불쑥 뱉은 말에 놀라서 황급히 일어섰다. 약간 놀란 표정, 너는 여전히 귀엽구나.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거려 커피를 시키는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다. 알바생은 나를 이상하게 흘낏거렸지만 나는 온통 내 뒤통수에 신경이 몰렸다. 네가 날 보고 있을까 봐 뒤를 돌지도 못 한채 음료가 나올 때까지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메뉴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 하나도 안 변했다."


입바른 소리 좀 그만 하라며 너는 앞머리를 다시 만지작 거리면서 눈을 흘겼다.


"됐어. 나 완전 아줌마 됐잖아. 요즘 안 그래도 주름살 때문에 스트레스라니까. 아참! 너 결혼했어?"

"아니. 아직. 너는?"

"나? 나야 애가 둘이다. 몰랐어?"

"뭐? 진짜야? 정말? 언제?"

"큭. 뻥이야. 아직 못 했어. 아니, 안 했어. 나 결혼 생각 없어. 돈도 없고. 애기도 별로."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너는 옛날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웃을 때마다 코를 찡그리는 것도 그렇고, 커피를 마실 때 향을 먼저 맡는 것도 그렇고, 진심인 듯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는 그 습관도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시간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처럼.


그 뒤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는 웃고, 나는 계속 질문하고, 너는 다시 웃고.

나는 그냥 니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네가 지루해하지 않을까? 네가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하지 않을까? 벌써 차를 다 마셔버린 건 아닐까? 어떻게 해서든 너를 붙잡아 두고 싶은 데. 한 번도 공부하지 않은 시험지를 받은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몇 시지?"

"응? 왜, 약속 있어?"

"아, 아니. 그냥."


시계는 벌써 저녁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직장인에게 평일 저녁 9시면 슬슬 졸릴 시간이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간다고 해도 집에 들어가 씻고 준비하고 누우면 어느새 12시. 연신 하품을 하며 피곤해하는 너를 보니 이제 그만 갈까?라는 말을 하려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았다. 하다 하다 미래 경제가 어렵니, 세상이 망해가니 북극의 곰이 말라 가는 이야기까지 했다. 정말 나란 인간 노답이다. 너는 점점 지루한 이야기에 지친 표정을 했다.


"피곤하다. 이제 그만 갈까?"

"벌써? 너도 다 됐네. 젊을 때는 새벽 3시까지 깔깔 거리고 놀던 애가."

"야, 나도 벌써 서른이 넘었다. 내일 회의 있어서 일찍 출근해야 해."

"그래. 하루쯤 늦게 자도 돼. 넌 이 오빠 만난 게 안 반갑냐?"

"반갑지. 반가운 데 너무 졸려. 그만 일어나자. 응?"

"어허."

"어허는 무슨 얼어 죽을 어허래. 빨리 일어나. 빨리."


너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작도 하지 않았다.


"뭐해? 안 가?"


나는 가기 싫었다. 괜히 핸드폰을 꺼냈다.


"나 뭐 찾을 게 있어서, 잠깐만 이것만 찾고 가자."

"뭔데. 가면서 찾으면 안 돼?"

"어허! 많이 컸다? 5분만."

"어이구."


너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빤히 나만 바라봤다. 나는 괜스레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집중하는 척했다. 그리고 네가 날 보는 걸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가지 마."

"응?"

"가지 말라고."

"뭐래니. 어딜 가지 마."

"넌 왜 그때나 지금이나 자꾸 간다는 말만 하냐. 서운하게."


나는 너의 얼굴을 쳐다봤다. 너는 앞머리를 만지면서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일어나라고 보챘다.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나 먼저 간다."


벌떡 일어서서 돌아서는 너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 데. 너는 얼어붙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감정이 앞서 간 것 같아서 후회되었다. 놀란 네가 또 십 년 전 그 날처럼 도망 갈지도 몰라.


"아파."

"아. 미안"


손목을 슬쩍 빼며 너는 그대로 돌아섰다. 나는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너를 따라나섰다. 어색한 공기가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이 느낌은 10년 전 그날의 공기. 네가 그만 만나고 싶다고 하던 날의 그 공기.


나의 뇌는 다 타버린 컴퓨터처럼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까는 장난이었다고 할까?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헤어지기 싫다는 감정만 막연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 여기서 버스 타고 갈게."

"데려다줄게. 같이 가자."

"아니야. 너 거기서 집에 가려면 차 끊겨. 그냥 버스 타면 돼."

"나 택시 타고 오면 되지."

"됐네요. 너 괜히 매너 좋은 척하지 말고. 돈 아껴. 어? 버스 온다. 나 간다!"


너는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미쳐 더 붙잡지 못하고 널 보냈다. 아무렇지 않게 버스가 떠나는 뒷모습만 바라봐야만 했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를 샀다. 너랑 헤어지고 한 번도 손대지 않은 담배였는 데. 오늘은 너랑 헤어지고 다시 손대게 된다. 가슴이 답답해서 깊게 마시고 뱉어내니 그래도 좀 살 것 같았다. 그러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머리가 띵하며 어지러워 금방 바닥에 버렸다.


밤공기가 드럽게 좋네. 언제 서울 하늘이 이렇게 맑았던가.

나는 무작정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그런 거는 생각나지 않고 아까 니 표정, 도망치듯 떠나는 니 뒷모습, 그리고 웃는 니 얼굴이 이런 것들이 뒤섞인 카드처럼 혼란하게 했다.


너 한데서 떨어지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서 코끝이 찡해지다 괜히 눈물이 왈칵 났다. 그게 뭐라고. 그냥 다 끝난 사이에 헤어지면 남이지 그게 뭐라고 이렇게 자꾸만 매달리는 거지? 나도 참 한심하다. 벌써 10년이다. 10년. 잊어버려. 걔는 너 같은 거 생각도 안 하고 잘 살고 있는 데. 나 혼자 매달린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 데 정말 왜 이러는 거니.


내 마음을 새로 부팅할 수 있다면, 내 마음을 꺼내서 다른 걸로 교체할 수 있다면.


니 생각 같은 거는 하나도 안 나는 날이 있다면,

예쁜 옷을 볼 때마다 니 생각 같은 거는 하나도 안 나고,

니가 좋아하던 연예인 새끼 나올 때도 니 생각 같은 거는 하나도 안나고,

가고 싶다고 노래를 하던 미국 여행 상품이 나와도 니 생각 같은 거는 하나도 안 나고,


니가 나한테 준 편지 같은 거 읽을 때도, 일기장도, 시계도, 뭣도, 지랄도,


야이 등신아.

그때 진짜 좋아했다면 니가 그렇게 사라져 가는 걸 보고만 있었을 까. 그렇게 울고만 있었을까.

뭐라도 했어야지 뭐라도 했었어야 했다.


그래. 정신 차려. 지금도 눈물이 나는 건 미안한 죄책감 때문인지도 몰라. 아무것도 안 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일지도 몰라. 그리고 여전히 책임감 없는 인생이야. 모든 걸 놓치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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