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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24. 2016

(1분소설) 확인

머리로는 절대 알 수 없는

화마가 삼킨 듯한 지독한 여름이 지나고 새벽 공기가 냉정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겨울이 다가왔다. 나는 감기 몸살이 걸려 10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은 회사를 결근했고 다음 날 오후에 출근하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좀 더 쉬라고 했지만,

말과는 다르게 밑에 직원들은 '저기, 부장님 죄송한데요. 이거 급하게 결제해야 해서 죄송합니다. 이것만 봐주시면...'


카톡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보냈고, 거래처에서도 업무 진행 때문에 수 십통의 전화가 왔다. 영업팀 부장인 나는 결제를 해줘야 경리팀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아프다고 일을 딜레이 시킬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창문 틈으로 쏟아지는 볕에 눈을 뜨니 밤새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한 것처럼 몸이 욱신 거리고, 뒷골이 당겼다. 자동으로 눈이 떠지고 뒤이어 알람이 울린다. 몸의 습관은 그렇게 무서웠다. 그러나 자꾸만 이불이 뒤에서 날 잡아당겨 늪으로 빠져드는 느낌. 아니지. 회사의 일이 아른거려 털고 일어났다.


내 나이 벌써 마흔, 언제 이렇게 되었나 싶지만 일에 빠져 하루하루 보내다 보니 벌써 사십 대가 되었다. 몸은 거짓말을 안 한다.


그 동안 만나는 여자도 없이, 아니 솔직히 말하면 몇 번 누군가의 소개를 받은 여자는 있지만 다들 내가 일에 미쳤다며 울고 불고 떼를 쓰다가 헤어졌다. 아니 도망갔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기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한 편으로는 내가 그 이상으로 마음을 주지 못 했기 때문에 일에 빠진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나도 연애에 대한 마음은 접은 상태다. 연애를 못 하는 건 반은 타의고 반은 자의다.


뚜루루루.



"어디야, 회사냐?"


"어, 엄마 이제 출근 하려구요."


"밥은? 약은 먹었어? 약 먹으려면 밥 먹어야지."


"먹었어요."


"진짜 먹었어?"


"먹었다니까. 나 이제 괜찮아."


"어휴. 니 놈이 장가를 안 가니까 이 애미가 챙겨야 되자녀. 만나는 여자 없어?"


"아침부터 또 왜 이러실까."


"왜 이러긴! 몰라서 물어? 나이가 마흔이면 너 어디 가서 돈 주고 데려와야 해."


"참나, 나처럼 잘난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나 지금도 따라다니는 여자 많아요."


"저저저, 니 놈 따라다니는 여자 있으면 한 명 데려와. 내년 설에는 혼자 오려면 올 생각도 하지 말고."


"또 왜 나한테 스트레쓰를 부리실까. 엄마나 어디 영감 한 명 꼬셔서 시집이나 가세요."


"너 인마, 내가 두 번 시집갈 동안 한 번도 장가 못 가면 너 내 아들놈도 아니다. 니 놈이 뭐 때문에 장가를 안 가고 그려? 노는 것도 한 때고, 그놈의 일인지 뭔지도 다 한 때여. 늙어봐라. 술 먹고 들어와서 마누라 가슴이나 만지다 자고, 어! 아침에 잔소리하면서 술국 끓여 주는 거 먹으면 속이 쏴-풀리고. 어? 그게 다 인생에 낙이다! 이눔시키 진짜. 그러니까 말인데, 어제 앞 집 김 씨 아줌마가 자기 사돈 댁 처녀가.."


"엄마 엄마, 늦었다! 이따 전화할게!"


"야가! 또또!"


"사랑합니다!"


"으이구.알았어!끊어! 나쁜 놈새키"


벌써 십 년째 같은 잔소리다. 질리지도 않는지 나만 보면 자꾸 결혼하라는 데, 어머니 죄송합니다. 쉽지 않네요. 젊을 때 갔으면 모르겠는 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조금 후회되는 면도 있다. 그때 일 조금만 줄이고 결혼할 걸. 아, 콜록콜록,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이크, 벌써 시계가 오전 8시를 향해 가고 있다. 나는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



"어머, 부장님! 몸은 괜찮으세요?"


처음 보는 나의 결근에 직원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결근 한 번이 이렇게 큰 성화일 줄이야. 나 진짜 열심히 일했구나. 이상하게 집에 있을 때 보다 회사에 오니 오히려 몸이 가뿐해지는 기분이다. 이거 정말 워커홀릭인가. 내가 생각해도 조금 증세가 심한 것 같은 데. 일하러 오니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니 참나.


그때였다. 처음 보는 앳된 얼굴의 여자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누구지?


사무실로 들어온 그녀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더니 복사기 앞에 섰다. 그리고 한 참 이것저것 버튼을 누르더니 혼잣말로 중얼 댄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 가까이 갔다.


"저기, 누구시죠?"


"꺅,엄마얏!"


여자는 내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바닥에 쏟았다. 바닥은 A4용지 30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어떡해! 여자는 난처한 표정을 하면서 쪼그려 앉았다.


"어, 어떡해. 이거 순서 틀리면 안 된다 그랬는데. 아 어떡해. 어떡하지? 뭐가 먼저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나는 주섬주섬 종이를 집어 들어 그녀에게 줬다. 까만 눈썹에 짧은 갈색 단발, 깔끔하게 귀 뒤로 넘긴 머리, 작은 귀에 반짝 거리는 진주 귀고리가 단정해 보였다.


"근데 누구시죠? 처음 보는 데"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마케팅 신입으로 들어온 박소현입니다."

"아, 신입이군요. 저 영업팀 박 부장이에요. 반가워요."

"아, 부장님! 안녕하세요. 어맛!"


그녀는 인사를 하다 다시 또 서류를 우르르 쏟아 버렸다. 이제는 표정이 거의 울 것 같았는 데, 허둥대는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피식-웃음이 났다. 왠지 회사 입사 초기에 내 모습 같기도 하고, 나는 다시 서류를 집어서 그녀에게 줬다.


"제가 할게요. 괜찮습니다. 부장님. 아이. 제가... 예 고맙습니다. 부장님."


"근데 마케팅팀에서 영업팀에는 웬일로?"


"아, 저기 복사 좀 하려고."


"왜 거기서 안 하고?"


"아, 저, 그러니까."


"...?"


"아, 작동법을 몰라서 물어보기 좀 그래서... 여기서 연습 해.. 보려고."


"뭐? 참나. 복사를 할 줄 몰라서?"


"아, 제가 기계치이기도 하고 이런 큰 복사기 처음 보는 데 그냥 좀 미리..."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이 살짝 미소 지었다. 긴 속눈썹을 깔고 바닥을 보며 한 발을 자근자근 움직이며 툭툭 차고 있었다.


큭. 그 얘기를 들으니 나는 본능적으로 김대리 얼굴이 떠올랐다. 까칠 마녀, 김대리. 한 성깔 하는 그녀에게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지. 나는 왠지 그 마음이 이해가 될 것 같아, 복사기며 프로젝터 그리고 까칠 대마녀가 좋아하는 커피까지 여러 가지 회사 팁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하는 말에 매번 고개를 끄덕 거리며 들었다. 기계를 만지면서 오-오- 몇 번이나 놀랍다는 듯이 좋아하는 그녀를 보자니 참, 애들은 애들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신난다는 듯이 웃으며 내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처음에는 컴퓨터 켜는 것도 어렵더라. 그땐 그렇더라. 아는 것도 자꾸 어렵게 느껴지고 뭐 그럴 때가 있더라. 젊은 기를 받아서 그런가? 나도 왠지 기분이 싱싱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회사에서는 전체 회식이 있었다.

우리는 늘 가는 삼겹살 집으로 향했고 신입사원들의 소개가 있었다. 이번 달에 꽤 많은 직원들이 들어왔는 데 하나 같이 열정이 가득한 모습이다. 저 모습 삼 개월 뒤에도 글쎄, 원래 퇴사 욕구는 3,6,9로 오거든. 1년이라도 잘 버티길.


마지막으로 신입사원 소개에 그때 마주쳤던 그녀가 나왔다. 긴장을 잔뜩 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보였다.


"어, 안녕하십니까! 마케팅팀 신입 박소현입니다. 아직 잘 모르지만 열심히 배워서 회사의 매출이 크고 어,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발전하면서 더 노력하는 어, 어, 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와- 소현 씨 노래 한 곡해!"


우리 영업팀 김 과장이 장난을 건다. 사람들이 와- 하면서 박수를 쳤다.


"아, 저. 저, 노래는."


"노래를 못 하면 시집을 못 가요. 아 미운 사람~ 노래 못 하면 벌주 원샷이야~"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들이 다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떡할까 하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허참. 신입사원 장기 자랑 중에 이렇게 슬픈 장기 자랑도 없었을 거다. 그녀의 사수 까칠 마녀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고, 영업팀 남자들은 시시덕거리었다.


나는 정말 '쟤 사회생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싶어 또 웃음이 나왔다. 다음에는 이럴 때는 무조건 신나는 노래 하라고 알려줘야지.


"아, 안돼 안돼. 무효야. 소현 씨 아, 분위기 이럼 쓰나~ 이거 어떡할 거야~ 다른 거 없어?"


나는 김 과장에게 그만하라고 했다. 눈치가 빠른 까칠 마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신나는 노래를 뽑아 기세를 이어갔다. 그렇게 회식 자리는 무르익고 술이 한잔 두 잔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될 줄은.



자꾸만 신경 쓰인 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복도에서 그녀를 마주치면 신경이 쓰였다.

표정이 왜 저렇게 우울하지? 그러니까 왠지 모르게 그녀가 또 무슨 실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까칠 마녀에게 밉보이고 있는 건 아닐까? 분위기 못 타고 또 어리바리 대고 있는 건 아닐까? 기계치라는 데 괜히 회사 물건 고장 내서 혼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은 밝아 보이네? 핑크색 왠지 화사하다. 인사하는 목소리도 한 층 더 높고. 외근 나가나? 서류는 뒤섞어서 가는 건 아니야? 영업팀 오대리랑 친한가 보네? 요즘 자주 붙어 다녀.


젠장.

내가 왜 이런 걱정과 신경을 쓰는 걸까?

정말 이건 무슨 의미일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뒤숭숭한 감정들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런 긴장감과 의문이 결국 폭발한 것은, 첫눈 소식이 있던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성화에 일찍 퇴근하는 길이었다. 그녀와 까칠 마녀가 마침 퇴근을 하는지 복도로 나왔다.


"어? 부장늬임! 부장님!"


저 목소리는 필시 무언가 필요하다는 마녀의 음성이다.


"응 퇴근하나 봐?"


"부장님, 댁이 어디세요?"


"응? 나 삼성동 왜?"


"에이. 아니에요. 가는 길에 방향 맞으면 좀 태워달라고 하려고 했죠. 오늘 눈도 온다 그러고 추워서요."


"집이 어딘데?"


"저는 건대입구 쪽이고, 소현 씨는 거기 신도림 쪽일 껄요? 그렇지?"


"나 오늘 생일이라 집에 안 가고 어머니 집에 가야 해. 신도림 쪽으로 가니까 소현 씨 타고 가."


"와, 좋겠다. 타고 가."


"그럼 미진 씨는 역까지 데려다줄게 같이 가."


"이야! 진짜요? 역시 우리 매너 훈남!"


셋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까칠 마녀는 그녀에게


"소현 씨가 더 멀리 가니까 앞에 타."


"예?"


"그럼 부장님이 기사야? 네가 뒤에서 회장 자리에 앉게. 얘는 또 눈치 없이 굴어. 앞에 타라고."


"아, 네네"


"거 너무 신입한테 그런다."


"제가 뭘요. 요즘 신입 사원들 뭐 하라 그러면 맨날' 예? 왜요'?라고 하는 데 미친다니까요."


"그럼 왜 그런지 잘 설명해 주면 되잖아."


"휴. 설명해 주죠. 그러면 돌아서서 자기 마음대로 해 놓고 '이렇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또 이런다니까요."


"얼굴도 이쁘니까 마음도 이쁘게 씁시다. 우리도 다 그랬어."


"저는 안 그랬거든요? 흥."


"이봐이봐. 부장한테 대드는 거 봐. 뭐가 달러. 똑같구먼."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거 분위기가 밖에 날씨보다 더 얼음장 같네. 노래 들으면서 가자."


"예! 부장님 최신가요 고고!"


"어디 보자."


무심코 틀은 노래는 나미의 슬픈 인연이었다. 나는 갑자기 뜨끔했다. 그날 회식 자리에서 슬픈 인연을 들은 이후로 매일 들어온 노래다. 까칠 마녀는 ' 으유 아재 노래!' 라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와 그녀만 남은 차 안, 왠지 모를 정적이 일었다. 처음부터 아무 말도 없었던 그녀지만 ,까칠 마녀가 내리고 나서도 아무 말이 없으니 왠지 어색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저, 부장님"


"응?"


"저."


"어, 왜. 뭔 일 있어?"


"술 사주시면 안 돼요?"


"뭐? 술? 지금?"


"아, 아니. 그러니까. 시간 되실 때."


"갑자기 웬 술. 마녀가 괴롭히는구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럼, 일이 힘들어? 아님 다른 누가 또 뭐 라그래?"


"아니요. 그런 거 진짜 아니에요."


"그럼 갑자기 웬 술타령이야. 진짜 그냥 술 먹고 싶어서 그래?"


"네. 그냥 이유 없이."


"그래. 뭐, 술 사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날은... 이유를 들을 수 있겠지."


"저... 이 노래 한 번 더 들으면 안 될까요?"


"응?"


"저, 이 노래 좋아하거든요. 슬픈 인연"


"어어. 그래."


"...어? 눈이다. 부장님, 눈와요."


싸라기 눈이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와이퍼를 켜서 차창 밖을 닦아 냈다. 왠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차 안에는 슬픈 인연 노래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내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과 생각들이 폭발하고 있었다.


"여기 내려주면 되? 맞지?"


"네. 고맙습니다."


"그래. 내일 봐.조심히 잘 들어가고."


"저, 부장님?"


"응."


"왜 냐고 하셨죠?"


"뭐가?"


"술 사달라는 거..."


"응. 왜 그래. 걱정되네. 무슨 일 있을까 봐."


"걱정되세요?"


"그럼 걱정되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이 부장한테 술 사달라는 건 큰 일 있는 건 데. 나도 왠지 긴장되는 데. 너무 놀라지 않게 조금만 알려주면 안 될 까?"


"놀라셔도 되는 데."


"놀랄 일이야?"


"네."


"허 그거 참. 나 나이도 있어서 뇌졸중 올지도 몰라. 얘기해줘. 그럼 내가 사달라는 술 다 사줄게. 휴.무슨 술 사는 사람이 이렇게 애원해야 하나"


"죄송해요."


"알았으니까 도대체 뭔데."


"저, 부장님."


"응"


"저 좋아해 주시면 안 돼요?"


"...?"





내리는 눈만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장난인가? 이거 무슨 회사에서 몰래카메라야? 이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무슨 말인지, 나 잘 모르겠네. 소현 씨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 거야? 좋아해 달라니."


"그 말 그대로인데."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좋아해 달라는 게 ...이해가 돼? 나 늙어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 표현을 모르겠네. 나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부장님."


"어, 그래."


"감정을...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응?"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무런 답이 안 나오고, 또 안 나와서, 아니 사실은 정답이 이미 나와있는 데 내가 아니라고 머리가 아닐 거라고 생각해봐도, 아니면 도대체 뭐냐고. 이런 감정 이런 기분 도대체 뭐냐고. 머리는 절대로 죽었다 깨어나도... 결론을 못 내리는 것 같아서. 저 슬픈 인연 듣고 용기 낸 거예요."


나는 그 뒤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 참을 서로 말이 없이 정적이 흘렀다. 그때 뒤에서 차 한 대가 나타나 길을 비키라고 경적을 울려 댔다.


"저 갈게요."


"소현 씨."


"저. 술 사주셔야 돼요. 꼭."


그녀는 문을 열고 손으로 이마를 덮은 채 눈 속을 헤치며 뛰어갔다. 나는 일단 차를 피해야 할 것 같아서 집으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술이라니, 좋아해 달라니, 감정이라니, 슬픈 인연이라니...


지금까지 그녀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고, 그녀의 눈동자가 자꾸 아른거렸다. 그 작은 표정 하나 하나가 세세하게 스쳐가고, 나는 도저히 운전을 집중할 수 없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좋아해 달라니...


나는 마흔이 넘었고 그녀는 이제 입사한 스물네 살의 아가씨다. 아니 어린애다. 나도 남자고, 나도 자꾸 눈길이 가고 호감이 갔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녀가 불렀던 노래를 계속 듣고 있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 된 거잖아. 그녀도 내가 좋다잖아. 그럼 된 거잖아. 우리 마음 확인한 거잖아. 그럼 된 거잖아.


아니야. 정신 차려라. 갓 회사에 들어온 여자애야. 원래 처음 입사하면 선배가 멋있어 보이고 다 그런 거지. 능력 있어 보이고 그런 거야. 내 나이가 몇인데, 지금 이십 대 초반 여자애랑 그것도 회사 직원이랑? 안돼. 괜히 잘 못 했다가 내 이미지는 어떡할 거야.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수근 거릴 텐데 헤어지게 되면 어떡하냐고. 그녀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치자. 나까지 거기에 깨춤을 추면 되냐.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


미칠 것 같아.


나는 머리가 욱신 욱신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심장 한쪽이 저릿저릿했다. 이거 뭐지? 협심증인가? 그거 고민했다고 이런 거야? 왜 왼쪽 가슴 밑이 이렇게 뻐근하지? 왜 이렇게 숨이 답답하고 막 그렇지. 왜 그런 거지. 왜 그런 거야 왜!


나는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어 격하게 차를 몰아 불법 유턴을 했다. 반대편에서 오던 차들이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고 쌍라이트를 켜며 위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더 좀 더 확인하고 싶어! 지금, 그녀에게, 당장, 달려가서.


나는 정신 없이 전화기를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소현 씨, 어디야?"


"저, 집 앞이요."


"나와! 아까 거기로. 지금 당장."


"네?"


"술 먹자. 지금 ! 우리 둘이."



눈은 점점 굵어져 함박눈으로 변해있었다. 겨울은 깊어가고 결국 눈발은 거세어진다. 작은 눈이 쏟아지다가 결국 큰 눈송이가 돼버린다. 사랑은 커진다. 그리고 그 크기를 확인하는 순간, 모든 것은 걷잡을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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