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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29. 2016

(1분소설)레드

좋은걸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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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리리~


"어서 오세요".


그 남자다. 매일 오전 7시 40분에 들어오는 남자 레드.


레드는 그냥 내 마음대로 붙인 별명이다. 왜? 맨날 '말보로 레드 하나요.'라고 하니까. 편의점에 알바를 시작한 지 이제 한 달 정도 된 것 같다. 오후에 공부를 해서 매일 밤 9시부터 오전 9시까지 청담 사거리 세븐 일레븐에서 편순이를 시작했다.


지금은 심리 공부를 더 하고 싶어 대학원 갈 준비를 하고 있는 데,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대학원 준비를 하는 게 맞는지 틀리는 지를. 심리 쪽은 워낙 준비 기간이 길어 대학원을 다닌 다고 해도 연구소에서 임상을 거쳐 미국 유학까지 다 합치면 10년은 더 생각을 해야 한다. 근데.. 지금은 돈이 없다.


월세랑 생활비 때문에 편의점에서 일하는 데 페이가 그렇게 높지 않다. 대신 저녁은 때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날짜 지난 것도 사장님이 다 싸주시고. 그런 것 때문에 편의점 알바 야간이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일부러 선택한 일이다. 또 조용할 때 공부도 할 수 있으니까.


'말보로 레드 하나요.'


'4천5백 원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우리의 대화는 늘 이게 다다. 한.. 10초? 그래도 매일 보니까... 좋다. 매일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 보면 게으른 타입은 아닌 것 같다. 아니면 혹 약간 강박증 같은 게 있는 건가? 어떻게 늘 똑같은 시간에 저렇게 오지? 신기하기도 하면서도 뭐, 아침 출근족 들은 지하철 시간 맞춰서 나오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신기하게 그 사람이 가까이 오면 뭐랄까, 은은한 피존 냄새? 애기 냄새인가? 아무튼 좋은 향이 났다.

담배는 집에서는 안 피우는 건가?

 



밤 12시가 지나면 유통 기간 지난 음식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물건 재고 조사를 한다. 품목이 많아서 정확하게 세 놓지 않으면 loss처리가 되는 데 자칫 하다가 내가 물어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꼼꼼하게 관리한다. 사장님은 워낙 좋은 분이라 딱히 트러블 난 적은 없었는 데 그래도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니까.


새벽 3시가 돼가고 나는 공부하다가 너무 졸려서 물건 정리를 시작했다. 앞에 많이 빠진 음료들은 냉장고 뒷 창고에서 가서 하나하나 채워 넣는다. 박스가 워낙 많이 나와서 밖에 정리하러 가야 하는 데 오늘따라 회사 회식이 많은 지 계속 취객 손님이 들어온다.


매주 수요일 새벽 4시, 재활용 수거 차량이 온다. 오늘 재활용 버리는 날.


이번 주는 박스가 꽤 많아서 한 번에 가기 힘들 것 같다. 쓰레기도 넘치고... 빨리 정리해야지. 나는 넘쳐나는 쓰레기를 발로 꾸욱 밟아서 억지로 묶었다. 조금 버거웠지만 그래도 두 손으로 들면, 들고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쓰레기는 문 앞에 두고 재활용 박스부터 가져다 놓기로 했다. 재활용품들이 가득 쌓여 껴안고 가야 했는 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기우뚱 ~


어어어 어?


와르르르르르....



재활용품들은 힘 없이 바닥에 쏟아지고 내 손에는 박스 몇 개만 남았다. 젠장. 제엔장. 젠장. 젠장.


나는 바닥에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는 갖가지 재활용품들을 보니 힘이 쭉 빠졌다. 괜히 탓할 대상도 없이 짜증이 났다. 오늘따라 쓰레기는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에이, 그냥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몇 번 나눠서 버릴 걸.


나는 스스로에게 투덜투덜거리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집어 들었다. 가끔 손에서 무슨 기가 나가는 것처럼 모든 게 망가질 때가 있다. 그때가 너무 싫다.



술 취한 행인들이 힐끗힐끗 쳐다봤다. 빨리 갔다 버리고 와야지.



"에~아가쒸~ 여자가 혼자 이런궈 함 쓰놔아? 이 오빠가! 이 아재오빠야과아 해주까아악?"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에에에에~ 너도 여자라고 튕기냐? 어? 이런 쉬펄. 왜 다 튕겨? 어? 미숙이도 어? 내 엑!쓰! 걸!프!렌!드! 미쑤우기가~ 어허허헝....ㅠㅠㅠㅠ 갔어... 내가~놰에가아~ 싫데. 이 김선달이가아!! @@ 미쑤가...흑흑흑... 날 쏴아랑 했나아아앙 요오오오...그것만이라도~ "




미친놈.옘병하네.


나는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뛰어서 편의점으로 돌아왔다. 으휴. 진상들. 편순이를 하다 보면 진짜 별의별 진상을 다 본다. 나는 편의점에서는 딱히? 누군가와 부딪힐 일이 없는 편한 일일 거라 생각했다. 내가 편의점을 이용할 때는 그랬으니까. 그냥 물건 고르고, 주고, 찍고, 얼마입니다. 하면 돈 주고 오는 거잖아.


근데 생각보다 이상한 인간들이 넘쳤다. 어딜 가든 안 그러겠냐만은.


아침 댓바람부터 테이블에 앉아 깡소주를 연거푸 따는 아저씨, 매일 도장 찍듯이 와서 나무젓가락 하나만 달라고 하는 아줌마, 냉동 만두를 돌려서 거의 다 먹고 맛이 없다고 환불해 달라는 젊은 남자, 새벽에 와서 술주정하고 우는 어린 여자... 진짜 할 말이 없음이다. 그래도 아직 도둑은 안 만났는 데 그것만 생각하면 다행이지 뭐.

편의점에 강도가 들었다는 뉴스가 종종 나와서 겁이 나긴 한다. 그래도 어떡하리.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거밖에 없는 데.


나는 날짜 지난 삼각 김밥을 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휴. 하늘이 점점 보랏빛으로 변하는 걸 보니 벌써 해가 뜰 것 같다. 2 시간만 있으면 레드가 온다. 나는 거울을 꺼내서 앞머리를 정리하고 화장을 고쳤다. 보는 사람도 없는 데 혼자 설레발은, 쯧.





"아, 카드 지갑!!"


레드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덩달아 나도 당황했다. 레드는 시계를 보더니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쩌죠? 지갑을 안 가져와서. 죄송해요.



나는 괜찮다고 했다. 돌아서는 레드의 어깨가 갑자기 축 처진 듯 보였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담배 없이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별 걱정을 다 한다고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진짜 나도 모르게 ) 담배를 들고 편의점을 나가 레드 뒤를 쫓았다.


"저기요! 저기욧!!!! 잠깐만요!!! 헉헉!"


레드는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나는 숨이 차서, 말은 안 하고 담배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레드는 눈만 말똥말똥 쳐다봤다.


"네?"


"아....저...이거 그냥 가지시라고요. 매일 오시죠^^? 내일 주세요. "


"네? 아... 저..."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 하. 어. 저. 그러니까. 어. 매일 피우시는 데, 저. 안 피우면, 어, 건강에 해로우시니까. 어, 그게 아니라. 어. 심심하실까 봐. 그러니까 내일 주세요. 하하하."


"... 아... 고맙습니다."


"돈은 오늘 제가 미리 낼 테니까, 내일 오실 거죠?"


"네? 아. 네."


"그럼 늦으시겠는 데 출근 잘 하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웃었다. 

그 남자가 처음으로 웃는 걸 봤다. 아 뭐야.ㅠㅠ 엄청 이쁘게 웃잖아. 치아 배열도 고르네. 뭐지. 그러고 보니 편의점 밖에서는 처음 보는 것 같아. 표정도 엄청 자상하고... 당황한 얼굴도 귀여워. 아, 어뜨케에에에~


나는 편의점으로 돌아오면서 혼자 발을 동동 굴렀다. 꺄악 너무 멋있어. 레드 너 왜 이렇게 멋있니이이이.


편의점에는 중년 손님이 멀뚱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크.


"죄송합니다아아~"


콧소리가 한 껏 나왔다. 손님은 표정을 갸우뚱 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요즘따라 내꺼인듯 내꺼 같은 너어어어~



아울~! 벌써 내일이 기다려졌다.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나는 레드 생각에 미친 것 같았다. 밤새도록 아침 일을 되감기 했다.

그 얼굴이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녀 거스름 돈도 잘 못줘서 손님에게 욕을 디지게 먹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레드를 쫓아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내 머리와 몸, 마음,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 들어 이미 나를 점령해 버렸다.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걸까?



"어이,좋은 일 있나 봐?"


"아 사장님! 오셨어요."


"뭘 입을 헤- 벌리고 식식 웃고 있냐?? 뭔 일 있어? 로또 됐어?"


"흐흐 제가 그랬나요?"


"어어? 또?저봐 저봐."


"아이고, 아니에요. 근데 이 새벽에 웬일이세요?"


"응, 요 앞에서 친구들하고 한 잔 하다가 우리 영희 씨 배고플까 봐. 저 앞에 엉터리 있지? 거기 가서 밥 먹고 와. 응?  내가 보고 있을게."


"정말요?"


"어, 그럼! 엉터리 사장님 알지? 가서 내 얘기하면 자리 알려줄 거야. 친구들 한테도 말해놨으니까 천천히 많이 먹고 와. 알았지?"


"와! 역시 울 사장님 최고!"


오늘 무슨 전쟁에 나라를 구했나? 오늘 왜 이렇게 좋은 일이 많지? 진짜 아싸뵹이다!


나는 신이 나서 한 걸음에 뛰어갔다. 역시 기분이 저기앞일땐 고기앞으로~ 룰루랄라~



.... 그때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한 남자!




으악!!!


억!!!!



둘 다 놀라서 마주치는 순간,




"... 레드?"

"... 편의점?"



묘한 타이밍이었다.




"어디 가세요?"

"아, 저 여기 엉터리에."


"아... 일 끝나셨나 봐요."

"아니요. 사장님이 잠깐 봐주신다고 먹고 오라고 해서."


"아..."


"댁에 들어가시나 봐요."

"아, 친구 놈이 잠깐 보자고 해서 나가는 길인데."

"이 새벽에..."


"그러게요. 미친놈. 내일 출근해야 하는 데 솔로 됐다고 계속 징징대네요. 모태 솔로도 잘 사는 데 꼭 있던 것들이 더해요."

"아...(모태솔로라고? 여친 없구나. 나이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아, 네."


"아참! 저 오늘 아침에 감사했습니다. 저 때문에. 지금 돈 드릴게요. 잠깐만요."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내일, 주세요. 내일 오시죠?"

"하하. 네. 그럼 내일 꼭 갈게요."

"내일. 꼭."


"내일 봐요."

"..... 네 (아, 뭐야. 연인끼리 헤어지는 인사 같아. 꺄악 >_<)


레드와 헤어지고 나는 완전 신이 넘쳐, 눈 오는 날 강아지처럼 기뻤다. 이게 인연이지. 하늘이 정한 인연이 이게 아니면 뭐야? 어떻게 하루에 두 번이나 이벤트가 생기느냐 말이야. 마음이 붕붕 뜨고 계속 즐거웠다.

고기에 쩔은 손님들도 귀여워 보이고 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우리 귀여운 레드는 여자 친구도 없대요. 여자 친구도 없어.꺄아아아아아아~


흥.

여자 친구가 없긴 왜 없어? 여기 있지. 나 이영희! 하하하하하



사랑은 그렇게 내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훅 들어왔다.



드디어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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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 어, 오셨어요^^?"


어제 밖에서 봤다고 벌써 한 발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왠지 더 멋있어 보이는 나의 레드. 레드는 고맙다며 나에게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다. 나는 쭈뼛쭈뼛하다 노란 단지 우유를 골랐다. 레드는 담배 하나와 우유를 결제하고는,


"저기, 혹시 남자 친구 있으세요?"

"네?"

"아, 너무 실례인가? 친해지고 싶어서요. 혹시 남자 친구 있으면 불편하실 까 봐. "

"없어요. 없어요. (아... 너무 티 나잖아.)"

"그럼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매일 보는 데 친하게 지내요."

"아, 네. 네."


나는 핸드폰 번호를 불러주고, 그의 전화번호를 번개처럼 내 핸드폰에 저장했다. 김정혁. 레드의 이름은 정혁이다. 정혁이. 정혁이. 혀기혀기. 아유, 이름도 왜 이렇게 이쁠까. 오늘 보니까 한쪽 눈에만 속쌍꺼풀이 있다. 진짜 어머님이 누구니. 어떻게 널 그렇게 키우셨니. 감사합니다.


이거 그린 라이트지? 먼저 연락처를 물어 본거 보면 이거 그린 라이트가 확실해. 나 오해해도 되는 거지? 아니 오해가 아니라 이거 진심으로 받아도 되는 거지? 사랑이라고 누가 확신 좀 해줄래?




하루 종일 쪽제비 눈을 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핸드폰만 바라봤다.


"뭐 할까. 내가 먼저 보내볼까?"



밥 먹었어요? 아니야. 뭐하세요? 아니야. 일하겠지 뭐하기는 등신아. 음. 바쁘세요? 네.라고 하면 어떻게 ㅠㅠ 기다리자. 음. 여자가 먼저 보내면 지는 거야. 기다리자. 기다리자. 기다리기 싫다. 기다리자. 그냥 전화함 해볼까? 아니야. 참아라. 영희야. 도도하게. 엉? 도도하게는 무슨ㅠㅠ 얘는 번호를 물어봤으면 연락을 해야지.

뭐하니 레드야.


야, 레드!!!! 너... 손가락 고자니?



나는 퇴근을 하고도 집으로 돌아가서도 잠을 잘 수 없었다.  혹시나 자는 동안 연락이 오면 어떡하나 하고 핸드폰만 붙들고 있었다. 화장실 갈 때도 비닐에 꽁꽁 싸서 들고 들어갔다. 하지만, 연락은 도통 오지 않았다.


저녁 9시...


나는 연락 한 통 없는 레드가 미워졌다.

아침에 받은 연락처를 몇 번이나 눌렀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아니 연락도 안 할 거면서 번호는 왜 따가? 친해지고 싶다더니 뻥인가? 그럼 번호는 왜 물어보냐고. 진짜. 나참나.


연락을 해? 말아. 해? 말아.해?말아..


나는 계속 고민만 하다 결국 12시가 넘어 버렸다. 결국 '이 시간이면 자겠지.'라는 생각이 드니까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그린 라이트는 무슨, 미친! 고장난 신호등이다!

그냥 미안해서 물어본 건가 보다. 미안한데 번호는 왜 물어봐. 아니 번호를 왜 물어보냐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진짜 이거 바람둥이 아니야?

나쁜 남자 스타일인가 봐. 갑자기 스스로가 미끼를 콱 물어서 삼켜버린 기분이 들었다. 남의 마음을 들여 다 볼 수 없으니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그렇게 불평등 한 가보다.




늘 같은 시각. 오전 7시 40분.

아침에 온 땡돌이 레드는 날 보더니 살갑게 인사했다.


헐.장난하냐?


흥. 나는 왠지 기분이 센치해져 크게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웃기고 있어. 뭐가 저렇게 신나서, 연락을 왜 안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는 데, 자존심이 상했다. 왜 연락을 안 하는 거야? 그리고 뭐가 좋아서 아침에 방실방실 웃으면서 나타나. 이쁘게. 미워할 수도 없으니 더 미웠다. 혼자 자존심 상하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해서 오히려 내가 싫어졌다. 등신. 난 왜 이럴까.



결국, 방실방실 웃는 레드를 본 나는

참다못해 점심시간까지 눈을 벌겋게 뜨고 있다가 레드에게 카톡을 보내버렸다.




바쁘세요?^^



읽씹이라니. 읽씹은 뭐야.

!!!!!!!!!!!!!!!! 이 손가락 고자 쇄퀴야!!!!


짜증이 솟구쳤다. 읽었는 데 왜 답장이 없어. 진짜 노매너에 똥매너네. 나는 짜증이 나서 전화기를 꺼버렸다. 벌써 시계가 오후 세시를 가리켰다. 나는 화가 나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덮었다.


으아아아아!

이 나쁜 놈아!!!!!



혼자 소리 지르고 난 후 방은 정막으로 내려앉았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까지 났다. 이게 웬 신파극이야. 진짜 찌질하다 찌질해. 나는 코를 훌쩍이다 결국 잠에 빠져 들었다.




주말에 시간 되면 영화 볼래요?


...!

레드는 저녁 11시가 돼서야 답장이 왔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아까 읽씹 한 것에 대한 분노인지 왠지 나만 매달리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일한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답장을 하기 싫어졌다. 그래서 괜히 인터넷 서핑을 했다. 게임을 켰다가 몇 판 지고 나니 그것도 흥미가 떨어졌다. 남의 페이스북을 이것저것 보다가 또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도 재미가 없었다. 이걸 해도 재미없고, 저걸 해도 재미가 없었다. 공부? 며칠 째 책은 펼치지도 못 했다.





그냥 레드에게 답장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숙제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아요.


나는 결국 내 감정에 지고 말았다. 아무리 신경을 안 쓰고 답장을 안 해보려고 해도 신경 자체가 온통 핸드폰 속에 들어가 있는 데 그냥 스스로에게 솔직해 지기로 했다. 이러든 저러든 좋은 데 어떡하니. 좋아서 죽겠는 데 내가 손해든 뭐든 좋은 데 방법 있어? 그냥 좋아하는 거지 뭐.



우리는 그렇게 주말에 첫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그동안 공부한다고 옷을 너무 안 산 것 같아서 옷장을 열어보니 다 낡은 옷뿐이었다. 사람까지 꾀죄죄 해 보이는 게 한 5년은 늙어 보인다. 일부러 3시간만 자고 일어나 쇼핑을 나갔다.



나는 오랜만에 네일 아트도 받고 거금 들여서 원피스도 샀다. 여기저기 기웃 대다 립스틱도 하나 장만하고 뿌리 염색도 했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이제야 좀 사람 같았다. 괜히 새로 산 옷을 입고 혼자 패션쇼를 하다 알바에 늦을 뻔했다.



낮 알바 언니가 뾰루퉁 하고 있었지만, 나는 살살 달래서 집으로 보냈다.

이제 20시간 뒤면 첫 데이트다.

파이팅!



영화는 보이지도 않았고, 온통 신경이 옆에 앉은 레드에게 가 있었다. 레드는 영화관은 진짜 오랜만이라고 했다. 남자끼리는 영화관 와서 잘 안 보다면서. 그 말이 너무 기뻤다. 다른 여자랑은 안 왔다는 뜻 아닌가. 립서비스 인가? 나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영화를 보고 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드는 꼭 한 번 와보고 싶던 곳이라고 하면서 37층에 위치한 한 바에 날 데리고 갔다. 이런 곳에도 레스토랑이?



문을 들어서자마자 서울의 야경이 예쁘게 펼쳐졌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예약석으로 안내받은 우리는 전망 좋은 자리로 안내받았다.



"좋아하는 와인 있어요?"

"아, 아니요. 저 와인은 잘 몰라서."

"그럼 제가 시켜도 될까요?"

"아, 네."


능숙하게 주문을 하는 레드는 뭐지? 부잣집 도련님인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다가, 여기 꽤 비쌀 것 같은 데 하는 생각도 들다가, 밖에 펼쳐지는 야경을 보니 나는 그동안 뭐 하고 살다가 이제야 이런 데를 와 보나 하다가, 그래도 레드 덕에 이런 곳에도 와보네 하면서,


진짜 좋았다.

분위기도, 노래도, 술도, 너도.


계속 웃음이 났다.



달작 지근한 와인 탓인가?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레드는 재밌는 일도 많았다. 에피소드를 듣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달달한 와인이 자꾸만 땡겨 나도 모르게 와인 한 병을 둘이서 다 비웠다.


@_@


나는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하고 바람을 좀 쐬려고 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 뭐야. 추태처럼 보이게. 안돼. 정신 놓치마. 안 그래도 내가 지고 들어가는 데. 안 돼. 아 근데 너무 어지러워.


나는 결국 크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다가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화장실 앞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아... 조금만 쉬었다가,...







정신이 아뜩해졌다.




얼마나 지났을 까?




이거 어디서 많이 맡아본 향인데...


헉! 레드!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들어 보니 나는 여전히 화장실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대신 레드의 어깨에 기댄 채로...


그는 나를 찾으러 왔다가 내가 일어나지 않아서 그냥 옆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내 무릎에는 레드의 재킷이 덮어져 있었고 레드는 맨바닥에 앉아 나를 받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거 처음이야. 심장이 쿵쿵 울렸다. 심장이 머리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호흡이 가빠 떨리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의 자상한 눈이 너무 좋다. 그의 향이 너무 좋다. 재킷에서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났다.


괜찮아?


그는 커다란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끄덕,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를 바라봤다. 쓰다듬던 손이 점점 두 볼을 타고 내려왔다.


부드럽네.



그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분위기는 묘하게 긴장되면서 손의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신경쓰여.너.



우리 둘의 얼굴은 너무도, 너무도 가까웠다. 흐음... 그의 콧숨이 내 두 볼에 떨어졌다.

 


아...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모든 게 멈추는 것처럼 몸은 뜨거운 데 시간은 얼어붙는 것 같은

굉장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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