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관계

#클레멘타인 솔직 에세이

by 클레멘타인

엄마의 생생한 증언에 따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아기였다고 한다. 5살 터울의 언니는 잠시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고, 엄마도 하루 종일 칭얼대는 언니는 첫 째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였다고 했다.


"니 같은 언나면 지금도 10명은 키우겠다."


엄마는 그다지 손이 가지 않고, 울지도 않는 내가 신기했다고 했다. 신경 쓸 일이 없는 아이는 좋은 걸까? 손이 덜 가는 자식은 편한 자식인 걸까. 글쎄. 이 나이 돼서 생각해보면 빽빽 우는 것보다 순한 아이가 그래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엄마에게 두 명의 아기는 희망이면서 절망이었겠지.


문제는 지금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그 독립적인 아기가, 그대로 독립적으로 자라 버려서, 정말로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버린 거다. 이게 또 희한한 게 경제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독립된 게 아니고, 그냥 관계에서의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점이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던 3살 베기의 재능은 제 나이 10배 뒤에 변종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데, 나는 지금 누구에게나 편한 그러나 거리가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런 생활패턴은 지금 사는 도시로 이사 온 후 더 심각해졌다.

가끔은 걱정이 되다가도, 가끔은 전혀 이 생활이 불편하지 않고, 가끔은 이런 내가 아무 걱정이 안 되는 게 또 걱정이 된다. 억지 설정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러운, 편한 내 일상이다.


엄마는 흰머리가 성성한 내가 아직도 아기로 보이는지 집에 있는 걸 걱정한다. 걱정할만하다. 이 청춘을 왜 이렇게 잉여롭게 보내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밖으로 나가서 운동하자, 바다에 가자, 놀러 가자, 장 보러 가자 등등 다양한 문구로 날 야외로 불러낸다. 그러면 나는 또 못 이기는 척 화장을 준비한다.


결혼 시기를 훌쩍 넘겨버린 여자의 혼삶은 그야말로 회색지대다. 즐겨 가는 커피점의 오후 시간은 삼삼오오 모인 기혼자들의 아이 이야기로 넘실거린다.


결혼을 하고 싶은 건 아닌 데 어디에도 끼지 않는 삶으로 사는 건 가끔 좀 그렇다. 뭐가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냥 좀 그렇다. 하지만 또 익숙해져 버려서 또 그렇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가도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고 뭐 그렇다.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던 세 살 베기의 입에는 항상 고무 맛이 느껴지는 공갈 젖꼭지 하나가 위로하고 있었다. 진짜 젖을 달고 있던 엄마는 혼자 놀고 있던 아이의 등을 보고 있었겠지. 때때로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았나 싶을 정도로 삶에 치이고 치이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책상 밑에서 혼자 놀고 있는 막내를 찾아냈겠지.


하지만 이런 거리감과 독립심은 인간 그룹에 포함되기에 적합한 발달은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혼자만의 틀 안에 갇혀 희미하던 자아가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난 부작용을 겪었다. 어린 시절부터 관심도 없던 세상과의 연결점이 점점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방어막으로 변했을까.


세상의 생각과 관념을 삼키면서 자아는 구토한다.

나와 세상의 경계는 점점 또렷해지고, 선명하게 더 선명하게 버튼을 계속 누르고 누른다.

결국 관념의 이미지는 찢어져 산산조각 나버린다. 나는 부서지고, 깨지고, 상처 낸다. 후회되는 것도 많고 후회되지 않는 일도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차피 시간에 녹아 희석되니까 상관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절대고 싶은 날이 많아지고, 참아야만 하는 날이 늘어간다.


Tv를 보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연예인의 개인사처럼, 회자되는 시간이 사라진다고 해도 잊힌 건 아무것도 없다. 1년 , 2년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다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튀어 오르는 쥐덫이다. 으슥하게 숨어있던 단어 하나에 수많은 고통이 되살아난다.


아무 말 안 한다고 가슴에서, 머리에서 사라지는 관계란 건 없다.

그저 먼지처럼 둥둥 떠다니다 바닥에 가라앉은 기억들이 거기에 있다.


누구도 잊은 적이 없다.

말하지 못한 지난날을 탈탈 털어내 새롭게 시작한다는 건 그냥 기분 탓이다.


아무래도 횡설수설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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