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불타는 건 내 머리다

#클레멘타인 영화

by 클레멘타인

욕망을 불태우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유아인 스티븐 연 그리고 이창동 감독 그저 이름만으로도 안 보면 손해날 것 같은 영화 '버닝'. 그런데 예상보다 인기가 없는 건지, 아니면 지금 갑자기 재미있는 영화가 많이 나온 건지, 영화관 상영이 하루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본 사람도 안 본 사람도 반응이 극과 극이고.


뭐, 그러니까 나는 더 궁금할 뿐이고.

스포 많습니다.




존재와 부재


머리 아플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머리가 아파서 도대체 무슨 감상문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네. 여주인공 해미는 오랜만에 만난 종수에게 귤 까먹는 팬터마임을 보여주는 데 어떻게 그렇게 잘하냐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없다는 걸 잊으면 된다고.


간절히 욕망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침이 고이게 되는 게 인간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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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는 그렇게 부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가상의 행복을 쫓는다. 그러므로 해미는 무엇이든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 부재는 잊음으로 존재하게 하는 인간.


그러나 종수에게 존재와 부재는 어딘가 모호하게 나오고 있는 데 그래서 누구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여전히 어떤 글도 쓸 수 없는 상태.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해 존재하기도 부재하기도 한 상태다. 그렇게 끝없이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인정이 없으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마치 종수가 아버지 탄원서 싸인을 받으러 마을의 한 집에 찾아갔을 때 집에 있던 외국인 부인의 입에서 자꾸만 "없어요"가 튀어나온 것처럼 말이다.


아니, 집에 자신과 아이가 있는 데 아무도 없다니?


그렇게 어떤 이들은 존재하지만 부재중이다.

이런 점은 종수의 엄마도 마찬가진데, 분명 그녀는 존재하고 있지만 15년이나 연락이 없으므로 종수에게는 부재중이다. 그러나 뜬금없이 돈이 필요하다며 카페에 마주 앉아 있으므로 엄마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같이 있는 동안 엄마는 종수에게 1도 관심 없이 카톡에 푹 빠져있다. 그 둘은 공존하고 있는 것인가?


엄마라는 자리는 여전히 공석, 그러니 부재중이다.


이와 반대로 위풍당당 언제나 존재감 쩌는 한 사람, 벤. 그에게는 존재란 어떤 증거가 있어야 한다. 눈물이 슬픔의 증거이듯이 눈물 없는 벤에게 슬픔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욕밍을 충족시킬 수 있어서 삶이 무료한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란 별 일 아닌 일.


또다시 만들어 내면 되는 일일 뿐이다.



아무렇지 않게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아.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딘가 뻔드르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그를 바라보는 종수는 불편함을 느낀다. 인간에게는 폭식, 교만, 탐욕, 나태, 분노, 색욕, 질투 7가지 죄가 있는 데 이런 죄를 아무렇지 않게 짓고 살아간다.


특히 벤은 이런 죄를 짓는 일에 선구자, VAN 그래서 스스로 재료를 찾고 요리해서 먹어버린다. 두 달에 한 번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일을 함으로 자신의 힘을 확인한다. 나쁜 짓을 저질러도 잡히지 않으며 규칙을 만드는 이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관찰한다. 그렇게 힘을 가진 인간들은 모임까지 결성해 결핍에 시달리는 인간을 재미로 관찰하고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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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는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언제나 창문 너머 서울의 상징인 타워를 바라보는 집에서 욕망을 꿈꾸던 해미, 늘 배고픔에 시달리고 일도 자신이 하고 싶을 때만 하는 해미, 뭐 때문인지 빚만 잔뜩 지고 있으면서도 아프리카에 가버리는 해미.


그렇게 욕망의 덩어리를 주체하지 못 한 해미는 불쑥 세상의 끝에 가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언제나 어릴 때 못 생겼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그녀는 세상의 틀에 맞추기 위해 성형도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상태. 그렇게 결핍을 앓고 의미를 채우러 떠난 아프리카에서 알게 된 건 노을이 사라지는 모습과 그런 그녀를 채워줄 것 같은 벤뿐이다.


주황-피 같은 빨강-보라-남색-그리고 검정의 색만이 그녀에게 상실감으로 남았고 이런 자신을 받아주길 종수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종수는 질투심에 내쳐버린다.


이런 종수와 해미를 관찰하는 벤은 종수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두 달에 한 번씩 방치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그리고 종수의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울 거라고. 그것도 남의 비닐하우스를. 휘발유를 뿌리고 단 15분이면 모든 게 다 타오른다는 말.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그리고 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거죠.... 뼈 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이 말은 종수에 마음에 불씨를 남기고 그 날부터 해미가 연락이 닿지 않자 종수는 해미를 찾는 듯하면서 집 주변의 비닐하우스를 자꾸만 돌아본다. 집 주변에 불 탄 비닐하우스는 없다. 그 일이 더 종수를 타오르게 한다. 그래서 미친 듯이 달리고 달리며 모든 것에 집착한다.


벤의 사생활을 캐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운동하는 벤의 모습을 우러러보기도 한다.

뒤로 갈수록 우리는 종수의 모습이 어딘가 불편하다.


그는 과연 해미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벤처럼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




무언가를 태우지 않으면 안 되는 그레이트 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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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서로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해미는 누군가에 의지하며,

종수는 누군가를 따라 하며,

벤은 누군가를 파괴하며.


욕망은 늘 존재보다 앞서고 있다.

종수는 해미의 집에서 자신의 욕망을 쏟아내며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욕망을 풀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태울 수 있었던 건 겨우 담배뿐이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태울 수 없었던 그는 해미를 통해 벤을 만나면서 모든 걸 드러낸다.

서울 타워를 보며 자위를 하거나 꿈속에서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만족감을 느끼는 어린 종수를 만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각성하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면서 알게 된다.

해미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싶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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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던 해미가 사라진 지금 그의 욕망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사랑이라는 욕망을 거세당한 그는 이제 질서를 만든다.

자신의 욕망을 파괴한 벤을 불태우고 기존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모든 껍데기도 불태운다.

그렇게 훨훨 불타오르는 것들을 뒤로하고 서울 타워가 잘 보이는 해미의 집에서 자신만의 욕망을 써 내려간다. 그곳에 닿을 수 있을 때까지.




영화를 보고 소설을 보았는 데, 영화에서는 벤이 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마치 배워야 할 신적인 존재로 나오고 있고 책에서는 오히려 종수 역을 맡은 이가 나이가 한 참 많고, 벤은 어린 청년 역을 맡았다. 그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인데 어딘가 둘 다 친절한 구석은 없어서.


덕분에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는 데

이 사람 이렇게 어려웠었나 싶네. 그리고 영화는 색감이나 연기나 음악까지 다 좋았다. 다만 내 머리가 나쁜 건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흑흑.


이럴 땐 또 감독을 납치해서 구구절절 물어보고 싶은 마음뿐이네. 휴.

보고 나니 내 머리가 버닝이네. 스티븐 연 마지막 죽을 때 표정 꿈에 나올 것 같아.

마음이 너무 혼란하다.

괜히 으슬으슬 몸도 아프고. 머 그렇다.

끙.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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