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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14. 2018

믿음

2018.09.14


1.

밤에 안목에 다녀왔다.

밤에 안목에 간다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낮에 안목에 가는 건 그냥 안목에 가는 일이지만, 밤에 안목에 가는 건 마음이 헐렁헐렁해졌다는 소리다.


오늘은 차를 정비하고 시운전을 할 생각으로 안목을 갔다. 그리고 그 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만 다른 마음을 충족시키려고 굳이 하는 일이었다.


출발과 동시에 하루 종일 믿음을 줬던 정비사의 말과는 다르게 차는 여전히 덜컹덜컹 소리가 났다.

결국 지출 전의 믿음은 지출 후의 불신으로 바뀌었는 데 그것은 빠져나간 액수와 정비례했다.


'부디 얼굴 붉히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차라리 바닥이 잘못한 일이라고 해주세요. '


안목을 향하는 내내 나는 마음속으로 가짜 핑계를 바라고 있었다.



2.

안목은 조용했다.

최근 바다 풍경은 좀 부족하지만 실내가 마음에 드는 그런 커피점을 발견했는데

마음에 드는 실내란 다음과 같다.


1. 발코니가 있을 것

2. 발코니 근처에 편한 (푹신한) 의자도 있을 것

3. 어렵겠지만 약간은 독립적인 느낌이 날 것

4. 1층 이외에 2층 또는 3층을 갖추고 있을 것


뭐 이 정도로 쓸 수 있겠다.


금요일 밤임에도 불구하고 안목은 고독한 가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때는 인기 있었지만 지금은 이름만 존재하는 옛 연예인 같은 풍경. 오늘 시내에서 강릉 야행을 하는 탓일까?


나는 오히려 '잘 왔다 역시 나는 고독과 짝꿍이지' 생각하며 며칠 전부터 들락거리는 카페 3층 발코니에 앉았다. 발코니 가장 가까운 의자는 무뚝뚝하고 등받이가 없다. 나는 약간 고민하다,  오랜만에 안목 밤거리를 눈에 담고 싶어 젖은 나무 위에 그대로 궁둥이를 붙였다.


지나가는 연인들, 또 드라이브 중인 남녀 한쌍, 그리고 사진 찍는 커플 등이 여기저기서 자신감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탁자 위에 조지 오웰의 1984를 펼쳤다 접었다 하면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단조롭고 집중되지 않는 그러나 계속하고 싶은 그런 무드가 좋았다. 다만 딱딱한 의자와 장막을 쳐놓은 듯한 바다, 시시하고 비슷한 풍경에 점점 하품이 몰려왔다.



3.

바로 그때였다.

나는 화장실 앞 소나무 밑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들은 처음엔 둘이었으나 둘은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 잠시 내가 한 눈 판 사이, 다시 남자와 남자가 되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이 인상적이었고 화장실 앞 소나무 밑이라는 사실도 오묘했다.

왼쪽 사람의 왼쪽에 철제 책장이 서 있었다.

어떤 종교 단체의 활동임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지난 올림픽 때 적극 활동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기에 꽤나 확신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 등 뒤에는 어떤 인생이 있을까?'


나는 그들의 삶을 상상한다.

저렇게 말쑥한 옷 안에는 어떤 외로움과 슬픔, 불안과 고통이 있기에 금요일 밤에 이렇게 비를 맞으며 자신이 받은 위로를 전하려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의 굉장한 편견 중 하나는 사람이 종교에 빠지는 건 자신이 감당 못 할 어떤 불안을 덮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건 종교뿐 아니라 어떤 상태나 물건 또는 인간 등 인간이 '빠질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 가령 나 같은 경우에는 고양이다. 고양이가 없던 시절,  인터넷으로 고양이 동영상만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이다. 가련한 인간 종족의 허둥거림. 그러니까 그런 중독적이면서 하게끔 되는 행동은 어떤 불안이나 괴로움 그것으로 도망가고자 할 때 쓰는 일종의 방어막 같은 게 아닐까?


그런 괴로움에 대해 생각하다 나는 괴로움에 빠진 물고기에 대해 생각했다. 뜬금없이 내가 상상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4.

<제목: 사막 물고기>


사막에 사는 물고기가 있었어요.

그는 자신이 물고기인지 몰랐어요.

그러니까 바다에 도달하는 순간 자신이 물고기인걸 깨달은 물고기가 있었어요.


물고기는 바다에 들어가 처음으로 숨 쉬는 일이 쉬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자신의 몸이 굉장히 빠르고 유연하며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종족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물고기는 행복했어요. 물고기는 매일이 즐거웠어요.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몇 년이 눈 깜짝할 사이 흘렀지요.


물고기는 갑자기 자신이 물고기란 사실이 싫어졌어요.

자신이 살고 있는 물속 세상이 권태로워 미칠 것 같았죠.

그곳은 무한 자유와 선택이 가능했어요. 못 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세상에 사는 그는 더 이상 자극받을 수 없었어요. 무감각한 하루가 고통스러웠고 모든 게 쉬워서 죽을 것만큼 지루했어요.


물고기는 매일 밤 해초에 누워 자신이 있던 사막을 생각했어요.

눈을 뜨면 주변이 온통 사막인 꿈도 꾸었어요.


뙤약볕 아래서 느꼈던 고통은 분명 괴로웠지만 바람을 느낄 수 있었어요.

사막의 선인장은 시크했지만 작은 그늘을 알게 해주었어요.

지나가는 낙타는 울퉁 불퉁한 혹 사이에 자신을 태우고 오아시스를 찾아 여행하곤 했었죠.


써글써글한 모래가 부레에 끼여 숨쉬기 어려웠던 날마다 버티기 버거운 고통에 울기도 많이 울었건만,

모래 폭풍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생각을 하면 물고기는 어딘가 아련했어요.

그때를 돌아보면 스스로 용기 있는 생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저 고통을 잘 버티며 살아냈다는 자체만으로도 생명의 위대함이 있던 시간이었어요.


반면

물 속은 너무 평화롭고 부드러웠죠

안락한 품에서 마음이 매일 사막이었어요.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물고기들은 미쳤다고 했어요.

그 힘든 곳에서 어떻게 돌아왔는 데.

왜 다시 그곳을 그리워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죠.


물고기 자신도 왜 그런지 몰랐어요.

아닌 척 살아보기도 했지만 물고기는 가슴속 어딘가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했어요.

그곳에 두고 온 선인장 때문인지, 미쳐 고맙다고 인사하지 못 한 낙타 때문인지, 단순히 비늘을 간질이던 바람이 그리운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어요.


'나는 아무래도 다시 가봐야만 할 것 같아.'


그곳에 진짜 자신이 있었던 거 같아 물고기는 두고 온 자신의 영혼을 찾으러 가야만 했어요.

물고기지만 물고기로 살 수 없다는 걸 알아버린 물고기는,



5.

물고기는, 하고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왜냐면 물고기가 사막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신세 한탄만 하다가 술을 먹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거북교에 빠지게 되었는지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새로운 용기를 내고 다시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는지 아니면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또 다른 고통에 빠져들었는지 아무튼 무엇을 선택해도 물고기는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앞에 선택지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것들이고 좋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재빠르게 무엇이든 선택해야 하는 일이, 살아내야 하는 일이,  우울과 고통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선택지를 쥔 삶이,


좀 서글프다.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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