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레멘타인 Sep 12. 2018

계절

2018.09.12


남은 겨울


그러니까 그 해, 미쳐 봄이 오기 전 길게 남은 겨울은 모든 게 뾰족했다.

텅 빈 방 안 검은 새벽이 뾰족했고, 괜찮다 괜찮다 말하는 안 괜찮은 마음이 뾰족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뾰족한 발끝에 퉁퉁한 고양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깎아낸 마음을 문질러 모든 걸 까맣게 덮었다. 까맣게 까맣게 덮다 보면  봄도 까만색이었다. 까만 봄에 피는 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암흑에서 빛이 태어나므로 나는 꽤 간지러웠다. 마음이 간질거려 웃을 준비가 되었던, 그러나 정작 웃기지 않았던, 왔었지만 없었던 봄.


여름


10만 원을 투자하면 100만 원이 되고, 100만 원을 투자하면 200만 원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셈에 약한 나는 여전히 부채에 시달린다. 모든 부채는 사람을 성실하게 만든다. 사람을 성실하게 만드는 게 빚이라는 사실이 꽤 슬프고 괴롭지만, 나란 존재는 그렇게라도 기만한 여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작은 숫자들이 통장에 찍히는 날마다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당신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러쿵저러쿵 살아냈으니 그 어떤 일에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만했으니까.


가을


실격이다.

양심 같은 건 냉장고에 넣어두고 잊어버리고 싶다. 실컷 웃고 나면 왜 웃었는지 모르겠다. 집에 오는 길에 그 어떤 이유로든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옆에 앉아 같이 울고 싶다. 하지만 눈물도 너무 오래 냉동실에 넣어 둔 탓에 말라비틀어졌다. 냉동실에는 유통기한 넘긴 성에 낀 마음이 까만 봉지에 들어 있다. 그 옆으로 사랑도 꿈도 희망도 바짝 얼어 있다. 냉동실은 이미 그런 것들로 넘쳐나므로 나는 실격이다. 이대로 겨울이 올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그러하다.



@클레멘타인




매거진의 이전글 대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