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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12. 2018

대리

2018. 09.12


불편하지 않으면, 몇 가지 퀴즈를 내겠다고 했다.


나는 혹 이대로 어물쩍 야한 이야기로 빠지는 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났지만, 까짓거 그런 사태가 온다면 내가 백배는 더 야하겠어!라는 다짐을 하며 퀴즈를 받아들였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흥부와 놀부가 있다. 그들의 성은 무엇인가?

2. 심 봉사의 이름은 무엇인가?

3. 초승달과 그믐달은 모양이 비슷하다. 뭐가 다를까?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 한 나는 첫 질문인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받았을 때 음. 이것은 필시 난센스일 거야. 하며


"남성?"


이라고 답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저는 안가, 안씨예요. 김씨, 최씨 이런 것처럼 흥부와 놀부도 성이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뭐야, 이건 야한 이야기도, 난센스도 아닌, 순수한 레알 진짜 퀴즈잖아!!! '

하며 속으로 놀란다.


그제야 20년도 더 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나의 순수한 뇌 속엔 그들의 성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으- 맞추고 싶다. 맞추고 싶어! 이상한 집착에 술이 깨기 시작하자 나는 어서 그가 두 번째 퀴즈를 내주길 기다렸다.


다행히 두 번째 질문은 알고 있는 것이라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답을 뱉었다.


"심학규!!!"


호기롭게 준비한 질문과 즐거운 해설 시간을 펼쳐 볼 기회를 잡지 못한 그는 나의 정답을 어색하게 축하해주었다. 나는 괜히 맞췄나 하는 마음이 약 0.1% 정도 들었지만 나머지 99.9%는 하나라도 맞춘 것에 안심했다.


심학규는 답을 알고 있기도 했고, 정우성이 마담 뺑덕에서 굉장히 섹슈얼한 뒷모습을 보여준 (케이블에서 나올 때마다 집중한다) 구미호 이후로 잊을 수 없는 내 잇! 영화다. 후후. 내가 정우성 좋아하는 걸 그는 몰랐겠지.


이런 나의 자만은 생각도 못 한 세 번째 질문, 과학 상식으로 허를 찔렸다.


달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이런 쓸모없는 노래만 자꾸 뇌에서 답으로 내놨다.

평소에 달 보는 걸 좋아하는 데, 저런 걸 수업 시간에 배웠던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나의 순수한 뇌 덕분에 그는 즐거운 해설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나 역시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하는 동안

만약, 내가 과학을 좋아하고 수학을 좋아했다면 내 인생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까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과학보단 국어를 수학보단 영어를 좋아했다.


 약 15분이 주춤주춤 흘러갔다.
그는 자신이 준비해 온 퀴즈 타임을 할 수 있어서, 게다가 적당한 나의 맞장구도 들을 수 있어서 기뻐하는 눈치였다. 만약 내가 피곤하니 싫다고 거부했거나 심드렁했다면  섭섭했겠지.퀴즈 진행하는 시종일관 같은 톤과 빠르기로 말했는 데, 도대체 얼마나 연습할 걸까?


이윽고 폭포 사거리에 도착했고 빨간 신호를 받자 그는 스마트폰을 뒤적였다. (이 역시 준비된 시나리오인듯하다)

잠깐의 정차시간 동안 그의 멋진 사진을 볼 수 있었는 데, 그녀는 국가대표 운동선수라고 했다. 곧이어 자신의 젊은 시절 사진도 (준비한 듯) 당당히 보여줬는 데, 군대에서 조교를 했다고 했다.


꽤 많은 이들이 늦은 밤 그 자리에 앉았었지만 그토록 신선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가 어떤 삶을 통과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다만  '일'이라는 것에 대한 그의 단단한 자세나 굳은 신념 같은 건 엿볼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종종 타인의 차에, 타인의 자리에,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일하는 동안 흔들리지 않으려는 굳은 심지도 함께.


내 안에는 뭐가 있을까?


글쎄. 여기저기 공란으로 남은 문장들과 너덜너덜한 자존심, 시도 때도 없는 후회와 아쉬움의 껍데기 따위가 뒤범벅 뒹굴겠지. 재미없음에 대한 염려증과 성적 매력을 상실한 물컹거리는 젠더, 오늘과 내일 사이의 새벽이 굵어지는 소리가 있다.


흠. 쇠똥구리가 똥까루를 열심히 모아서 딴딴하게 굴리는 것처럼, 나도 이제는 뭔가 똥글똥글 딴딴하게 잘 굴려보고 싶다.



뭐.
...아마, 불가능.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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