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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16. 2018

준비

2018. 09.16


1. 강릉


M의 초대로 J와 나는 속초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지금껏 세 사람만 따로 만난 적이 없으며 한동네 살지도 않는다.  평소라면 두 사람이 내가 사는 강릉으로 와야 했지만, 이번만은 M이 사는 속초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특이하고 느슨한 관계를 맺은 우리의 첫 모임은 어떤 준비도 없이 얼떨결에 약속이 진행되었고, 진행된 약속은 멈춰지지 않았으며, 멈춰지지 않은 약속은, 살짝 이탈할 뻔했으나, 어느덧 D-DAY를 맞게 되었다.

 

화장하고 고양이 밥을 챙기며

가고 싶은 마음 50%와 거기까지 가서 재미없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 50%가 1%라도 더 자리 잡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요 며칠 나는 노잼 스트레스에 빠져있었고 더 이상의 재미없는 상황은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나와 나의 싸움을 구경하느라 준비가 더뎌졌다.

머릿속으로 선물하고 싶던 시집은커녕 미리 찜뽕해둔 화분 가게까지 가지도 못하고 최대한 가까운 마트에 뛰어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2-1 속초


여차여차 약 15분의 지각을 한 우리는 드디어 속초에 도착했다.


첫 모임지는 속초 설악문화센터.

특히 스피커의 가격을 알고 난 후 나의 자본주의 레이더망이 켜졌고 그곳의 모든 것이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1층은 책으로 잘 정돈되어 있었고 2층은 기름진 클래식이 좔좔 흐르는 카페였다.

통유리 너머로 안개에 휩싸인 설악산 마저 신비롭게 보였다.


약 두 시간 동안 우리의 대화는 단순했다.

M과 내가 J를 놀리거나 J와 내가 M을 놀리거나

M이 나의 성격을 칭찬하거나 J가 내 생각을 칭찬하거나 세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칭찬하는 식의 대화였다. 그러다 좋아하는 책 이야기와 작가 이야기로 빠져들면 이야기는 점점 흥이 났다.


특별한 목적 없이 마냥 재미있는 사이.

어린 시절 이후로 만들기 어려워지는 어른과 어른의 무목적 관계. 그러나 어떤 주제나 어떤 목적 없이 아무 이야기를 해도 무방한 사이가 된다는 건 분명 굉장한 일.


'좋다'는 것보다 더 좋은 표현이 존재할까요?


J의 질문에 더 좋은 표현을 찾지 못한 우리는 그저 지금 너무 '좋다'라는 말만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볼이 터지도록 웃은 나는, 기분 좋은 일 앞에 겸손해질 수 없었다.  좋은 티를 내야만하는 나의 태도는 약간 우리나라 정서와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뭐든 잘 주고 잘 받는 게 좋다.


그게 나의 다정이었다.



2-2 속초



"다음은 바다가 보이는 횟집입니다."


M은 속초로 이사 온 지 1여 년 정도 되었지만, 그사이 많은 지인들이 다녀간 탓인지 관광 안내가 프로 수준이었다.


도착한 횟집은 커다란 바위가 우렁차게 자리하고 있는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이었다. 강릉으로 이사 온 이후 바다를 보며 횟집에서 회를 먹는 일이 오히려 더 적어졌기 때문에 나는 점점 완벽한 여행자가 되었다. 어스름해지는 바다 풍경을 앞에 두고 팔딱이는 회를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고 또 먹었다.


M의 계획에 따르면 다음 코스는 바닷가의 모닥불 타임이었으나,(M의 차 트렁크에는 실제로 늘 모닥불 세트가 준비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밖은 비가 부슬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M은 이런 일까지 미리 다 계산한 걸까?

전혀 당황하지 않고 바로 플랜 B로 넘어가게 된다.


"자, 아쉽지만 비가 오니 모닥불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리는 바다 야경이 보이는 롯데 리조트에 가서 무알콜 칵테일을 먹으면 됩니다."


세상에, 허점이 없어!

M의 준비는 완벽했다.


우리는 엄마를 따르는 아기 새처럼 M의 계획안에 들어가 착착 이동했다. 나는 평점 쓰는 란이라도 있었으면 이 여행에 지체없이 10점 만점에 10점, 별 다섯개를 줄 기세였다.


속초의 황홀한 야경까지 마스터한 우리는 시간의 압박을 느끼며 다시 설악문화센터로 돌아와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되었다.



3. 다시 강릉


강릉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 오르자마자 나는 마음이 시무룩해졌다.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줄어드는 음식 때문에 우는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오랜만에 만난 행복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M이 보여준 인간적인 환대와 진정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누구에게 그렇게 따뜻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누굴위해 그렇게 준비한 적이 있었던가.


강릉으로 놀러 온 지인들에게 나는 과연 잘 해줬던가? 바쁘다는 말만 백번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밤.

들키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생각들이 책상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M의 다정한 준비 앞에서 지독하게 길어진 하루.

나의 준비와 M의 준비는 그 긴 하루만큼의 간격이 있었다.


어른이 어른을 행복하게 해 주는 방법은 뭘까.

물론, 모든 행복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자본이 필요하지만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내가 행복해진 건 M이 준비한 시간이었고, 그 시간 속에 존재하던 타인을 위한 마음이었다. 물론 자본이 주는 경험도 절대 빠트리고 싶지 않다. 나는 도인이나 선비가 아니니까.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

모든 경험은 시간 앞에서 무뎌진다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은 통하고 사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게 증명된 하루.


그날 밤, 달콤한 꿈을 꾸는 이가 지금 꿈인걸 알아버린 슬픔처럼, 잠들면 모든 게 사라질 것만 같았다.

마음에 스민 행복을 보내기 싫어 나는 쉽사리 하루의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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