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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2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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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0



일명 박사라고 불리는 박사가 아닌 그는 정말 박사다웠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주석이 달렸다. 나는 약 2시간 30분의 대화 동안 다양한 건강 상식을 듣게 되었고 요즘 겪고 있는 불면에 대한 각종 처방과 최근 마음 상태의 상담을 받았다.


박사의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머릿속에 폭죽이라도 터지는 듯 생각이 많아졌는 데 그 일은 꽤, 괴롭기도 하고 막힌 하수구가 뚫린 것처럼 시원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요즘 나는 일종의 권태에 빠졌는 데,

작은 반복에도 미쳐버리는 성격 탓인지 정해진 루틴에 점차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권태에 빠진 이를 누가 구원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도 괴롭고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지독한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입금 전과 입금 후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나?

이러면 안 되지 하며 매번 정해진 선로 위를 달려보지만 마음을 다스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러기엔 짜릿한 욕망을 좋아하고 강한 자극을 좋아하는 도파민 결핍증 환자니까.

지독한 간사함을 몸소 체험하며 동시에 이대로 나의 삶을 망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발버둥 치는 나. 그런 나의 상황을 곰곰이 듣던 박사는,


"안 하던 일을 해봐."


무릎팍 도사처럼 박사의 입에서 나온 처방은 다음과 같았다.


1. 취미가 일이 되었다면 지금 하는 일은 일로 두고 새로운 취미를 찾을 것

2. 평소에 안 하던 일에 도전할 것

3. 자신과 즐거움을 찾아볼 것


음? 3번 옵션에서 마음이 갸우뚱했는 데 누군가가 새로운 취미가 된다는 사실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에게서 새로운 즐거움은 더이상 찾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박사는 우리가 하는 행위, 즉 두 시간 가량의 통화에 대한 중요도를 강조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누군가와 장시간 접촉과 대화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 일은 전혀 새롭지 않았으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속마음과 집안사를 툭툭 털어놓는 무경계 삶을 살고 있었기에, 이 모든 일은 전혀 '새롭고 신선한' 일이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런 건 재미없어.

왜냐면 나는 누구를 만나도 이 정도의 관계를 맺거든.

하지만 문제는 다음이야. 나는 그 이상의 궁금함이 없어.

그래서 나는 늘 그 커다란 공란에 대해 고민해. "


깊이 있는 관계의 부재는 굉장히 오랜기간 내 고민 중 하나였는 데, 눈치 빠른 박사는 초장부터 점쟁이 빤스라도 입었는지 나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박사의 이야기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이 있었는데


"어쩌면 넌 사람과 그 이상 관계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거나 해본 적 없을지도 몰라."


그렇게 시작된 박사의 이야기는 꽤 설득력 있었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었고 박사는 몇 가지 예시로 나를 진단했다. 얼마 전 자동차 정비소를 방문했을 때 본 정비소 사장님의 빠르고 간결한 진단과 비슷했다. 차를 방치하는 일은 위험한 사고를 유발하는 일이라며 굉장한 구박을 받았는 데, 박사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스스로 오랫동안 방치해 고장 난 차와 같다고 생각했다.


몇몇 질문과 이해와 반박을 펄럭이며 점점 나의 상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일은 꽤나 흥미로운 동시에 괴로웠고 종종 슬퍼졌으며 또 한 편으로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그 미지의 세계, 그러니까 무언가 마음이 덜컹거리지만 무엇인지 몰랐던 모호한 세계, 감정은 있지만 형태는 없던 어떤 것들의 세계. 혼자 아무리 읽어봐도 보이지 않던 오타처럼 나는 타인에게 결재 서류를 내민 이후에야 무언가 드러났다. 이런. 박사는 인간 디스패치인가.


"너의 이야기는 너무 괴로워."


착한 박사는 나를 괴롭게 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괴로웠다. 박사를 탓할 수도 나를 탓할 수도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되었는 데 우리는 서로 가해자 없는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박사와 전화를 끊고 재빠르게 슈퍼로 내려가 황도 두 개와 맥주 하나 그리고 약과 한 봉지를 사 왔다. 약이라도 복용하듯 급하게 입에 탁탁 털어 넣으며 마음의 위안을 찾았지만, 아마 이런 행위들은 임시적이겠지. 금이 간 유리에 테이프를 붙인다고 새로운 건 없겠지.


모르는 일은 욕망도 고통도 없다.

좋은 집에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곳에서 사는 경험을 알 수 없고,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않은 이상 그 맛을 상상할 수 없다. 퍼스트 클래스의 서비스를 받아보지 않은 자는 굳이 그런 돈을 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허리가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허리 아프다는 사람의 고통을 알리 없다.


나는 박사와의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내 상태의 원인이 될 법한 강력한 이유를 알아버렸고, 욕실의

곰팡이를 방치하다 어느 순간 모든 게 너무 눈에 띄어 소름 끼치는 것처럼, 마음에 많은 부재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마음 속 공란은 공란으로 남아 무엇도 쓰이지 않는다.


건강하지 못했던 관계들, 정해진 관계의 라인을 넘어선 적이 없는, 넘어가면 오히려 폭력이 되곤 했던,

방법을 몰라 오해하고 집착하고 사라졌던, 내 삶의 존재들에 대해 생각한다.


삶에는 너무 몰라서 괴로운 일도 있지만 너무 알아버려서 괴로운 일도 있다.

잠깐 지나가는 그런 기분이었으면 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눈을 감아도 어둠이다.


결국 나는 회전 교차로에서 어느 길로도 빠지지 못하고 계속. 계속. 계속. 회전하는 차가 되었다.

...끙...가을이라 그래. 가을이라.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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