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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Sep 19. 2018

추석

2018. 09.19


추석이 곧 다가온다.

매년 정해진 명절은 달아날 수도 없고 인생에서 삭제할 수도 없다.

모두가 그 경험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조건 통과해야만 한다.


나는 명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명절엔 가족이 모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아니지만)

명절이 싫은 게 아니라 가족이 모이는 게 싫다. 그러니까 싫다기보다는 어딘가 마음이 깔깔하다. 더 정정하자면 가족이 싫은 게 아니라 틀어진 가족 관계가 싫다.


명절이랍시고 동네 슈퍼 아저씨보다 더 뜨문 뜨문 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든다. 

지친 여정을 통과해 온 탓인지 다들 억지 반가움으로 호들갑을 떤다.

시간이 지나면 갑자기 피로 맺은 서열 정리를 시작한다. 어떤 주제가 나오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하는 데, 개념 폭발한 몇 인간들 때문에 결국 막장 드라마로 빠진다. 


'아니 저 인간은 왜 저런 안하무인 애어른이 되었지?'


시작이 무엇이든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감히'로 끝나는, 

가- 족같은 공동체안에서 세상 억울한 부당함을 느껴야 한다.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앞세워 참고 인내해야 하는 일들은, 훨씬 아프다.


아름답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일수록 추함이 더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그래서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일탈하며 적당히 막무가내인 인간이 되고 싶다. 


이미 꽤나 지저분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살아왔지만 게다가 그 적당함이라는 수위가 모든 사람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테지만, 어찌 되었건 착하거나 순수하거나 깔끔한 인간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가끔 정해진 답이 있는 도덕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면 나는 마음이 캄캄해져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나는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는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적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전혀 인간적인 특성(예를 들면 폭력 시기 질투 욕망 불안 분노 등)을 담고 있지 않은 , 다만 인간이 해야 할 것 같은 문화적 규율이 담긴 언어다.


가족은 마땅히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싫어한다.

가족에게 백 번 천 번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도 여전히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 밑에서 살아내는 일은 꽤나 불편하다. 생의 괴로움을 몸으로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나는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한다. 싫다.

 

이제제발신경좀끄고연락좀하지마,어떻게그러니식군데,그게무슨식구야그런인간들이,그래도어쩌겠니형제끼리그러는거아니야,그사람들은당신을형제로가족으로생각안해한다면그런짓은할수없어,그래도죽는다는데보고만있니아니면감방간다는데,냅둬그러던가말던가그리고그럴사람이면진작에갔지,그래도가족이면그러면안돼는거야가족이니까.(도돌이표)


삶은 결국 끝이 있고 우리는 과정을 통과한다.

통과하는 동안 많은 괴로움과 슬픔을 어떻게 악착같이 버텨내느냐, 그 방법을 궁리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걸 먹고,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는 일을 찾으며, 조금이라도 마음 편한 사람을 만나려고 무진장 애쓴다. 


그런 자기 위안 선택의 옵션조차 매번 포기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선택과 그런 말을 해야만 하는 그 가여운 영혼을 위해, 나는 그 마음을 지지해주기로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명절 활동이란 그런 일이다.


아마 언젠가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자세히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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