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개인에게 출산의 무가치를 가르쳤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4031722011
사람들은 여전히 여행을 간다. 휴가를 내고, 비행기를 예약하고, 비싼 숙소를 잡는다. 몇 날 며칠을 위해 수백만 원을 쓰고, 일상과의 단절을 감수한다. 돌아오면 사진은 남지만, 통장 잔고는 줄어들고, 피로는 오히려 더 쌓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행은 수익이 없지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산은 다르다. 그 어떤 선택보다 많은 자원을 소모하고, 삶 전체를 바꿔놓는 일인데도 사람들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출산은 자본주의 관점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소비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은 수억 원을 넘고, 그 대가는 불확실하다. 경력 단절, 소득 감소, 양육 스트레스, 부부 갈등까지. 손익을 따지는 세계 속에서 출산은 계산이 안 나오는 선택이다. 그래서 출산율은 떨어졌고, 결혼은 늦어졌으며, 아이 없는 삶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는다. 왜 여행은 가면서, 출산은 하지 않는가? 둘 다 수익을 남기지 않지만, 여행은 나를 위한 일시적인 자유이고, 출산은 타인을 위한 지속적인 책임이다. 여행은 끝이 있지만, 출산은 끝이 없다. 여행은 내가 선택한 순간으로 완결되지만, 출산은 내가 선택한 순간부터 타인의 삶을 계속해서 감당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은 내 삶을 살기도 벅차다”고. 그 말도 옳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의미에 대해 사유하지 않게 된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출산을 제도와 수당, 정책의 문제로만 다룬다. 하지만 출산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나는 이 세계에 또 하나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누군가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지원금으로 대체할 수 없다. 출산이 멈춘 것은 제도의 실패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질문이 멈췄기 때문이다.
심리치료학자 빅터 프랭클은 말했다. 삶에 무엇을 기대할까를 묻기보다, 삶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출산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출산을 손해라고 말하지만, 삶은 손익을 넘어서는 순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아이를 낳는가?” 그 대답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나는 이 아이를 통해, 삶이 내게 던진 질문에 응답하고 싶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질문을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로를 고민하지만, 존재의 방향은 고민하지 않는다. 성공을 배우지만, 책임을 배운 적은 없다. 사랑은 말하지만, 돌봄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출산은 점점 더 남의 일이 되었고,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출산은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의 부재가 더 본질적인 원인이다. 청년과 청소년이 삶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응답할 수 있어야 출산도 다시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묻지 않았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은가, 나는 어떤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이 사라진 사회에서 출산은 당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숫자를 바꾸는 건 제도의 몫이지만, 존재를 바꾸는 건 질문의 몫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출산율 반등 정책이 아니라, 의미를 사유할 줄 아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다. 삶을 이익이 아닌 응답으로 받아들이는 감각, 책임을 억압이 아닌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상상력, 그리고 타인을 나처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윤리. 그런 인간이 있을 때, 출산은 다시 ‘살아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수익 없는 여행은 떠나지만, 의미 없는 삶에는 머무른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출산이 아니라, 삶을 선택할 이유를 묻는 질문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