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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다시한다면

#719

by 조현두

처음엔

어디선가 불쑥 들어온 바람 같았다

조용히 자리를 틀더니

그 자리에 나보다 먼저 눕곤 했다


그의 집에는

이름 없이 불리는 것들이 많았다

기대라는 말도, 애착이라는 말도

벽에 걸지 않은 액자처럼

늘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고


나는 그 아래에서

온기 같은 걸 몸에 익혔다

의심하지 않고

한동안은 그를 믿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하루는 문이 닫혔다

그가 부른 건

내가 아닌, 먼지였다


나는 더 이상

등을 내어줄 수 없게 되었고

무릎보다 낮은 시선으로

세상의 틈을 보며 걸었다


낯선 손길이 다시 다가올 때면

나는 움찔하며 등을 세웠다

어떤 손길은 먹을 것을 주었고

어떤 눈은 나를 품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벽 아래에서 밤을 새우는 법을 배웠다

비에 젖은 시간을 말리지 않은 채

다만

견디는 일에만 익숙해졌다


그래서 지금

누가 문을 열어주어도

나는 머뭇거리기만 한다

들어가지도, 등을 보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마당 끝 그림자 속에 웅크린다


사랑은

다시 한 번 잃는 일로만

나를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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