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얘기하고 싶어
너의 그 교수님 이야기를 들으니까 장영희 교수님이 생각난다. 영문학 교수이자 에세이스트로 유명했던 장영희 교수님 역시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글을 썼다고 했어. 죽음에 가까워졌다고 해서 교수님 특유의 따뜻하고 긍정적인 메시지가 담긴 글이 달라지진 않았었어. 마지막까지 교수님의 글은 따뜻하기 이를 데 없었지.
요즘에도 가끔 장영희 교수님 책을 읽어. 사실 지금 내 책상 위에 교수님 책 <내생에 단 한번>이 있다. 며칠 전에 읽었거든. 한 번씩 꺼내 읽을 때마다 에세이 두세 편 정도를 읽어. 그리고 다시 책장에 꽂아 놨다가 기억나면 꺼내서 읽는 거지.
내가 교수님 책을 읽는 건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야. 따뜻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분위기. 교수님 글에는 자기반성이 참 많아. 자학 코드도 은근히 있고. 스스로를 못났다, 못났다 하면서 결국은 본인 스스로와 글을 읽는 모든 이를 품으면서 이야기를 끝맺는 방식도 좋아.
이 글도 좋았어. <어느 거지의 변>이란 글에선 교수님이 남들처럼 옷을 갖춰 입기 시작한 연유에 대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어. 교수님이 유학 시절 잠시 한국에 왔을 때 명동에 쇼핑을 하러 들렀었데. 윈도 쇼핑. 그때 입고 있던 옷은 낡은 청바지에 펑퍼짐한 티셔츠.
동생이 진열장에 걸려 있던 흰색 원피스를 입어보러 간 사이 교수님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던 교수님은 높은 문턱을 넘을 엄두를 내지 못하셨나 봐. 그래서 문 밖에서 안으로 고개를 내밀고 동생을 기다리며 서 있는데 가게 직원이 교수님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나중에 와요. 손님 있는 거 안 보여요? 나중에 오라는 말 안 들려요? 지금은 동전이 없다고요!"
거지 취급 한 거지. 그때 동생이 옷을 입다 말고 달려 나와 말했대.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예요? 우리 언니는 박사예요, 박사. 일류 대학을 나오고, 글도 쓰고 책도 내는..."
교수님은 그 직원의 입장에선 자기를 충분히 오해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해. "신체장애는 곧 가난, 고립, 절망, 무지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사회에서", 본인이 "목발까지 짚고 서 있었으니 거지의 모든 필요조건을 다 갖"추고 있던 셈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이후로 교수님은 옷을 선택할 때 기준을 이렇게 두기 시작했데. '거지처럼 보이지 않아야 할 것.' 그리곤 로션도 바르지 않던 얼굴에 화장까지 하게 됐는데 이를 "나름대로 거지로 보일 확률을 줄이고자 하는 시도"라고 말해. 그리고 또 이렇게 덧붙이지.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될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고 말이야.
책에서 읽은 건 아니고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서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었어. 사람들이 자기를 볼 때 언제나 소아마비를 함께 떠올리며 불쌍해하는 건 안타깝긴 하다고. 장애를 지닌 건 불편한 일이긴 하지만 교수님은 딱히 장애 때문에 불행했던 적은 없다고 말해. 도리어 장애 덕분에 삶의 많은 부분에 감사하게 됐다고 말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고 느껴졌어. 교수님의 글을 보면 정말 삶을 사랑하는 게 느껴지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교수님의 글엔 유머가 있어서 좋아. 유머! 난 유머만큼 강한 방패는 없다고 생각해. 삶이 내리꽂는 날카로운 창도 유머라는 방패 앞에선 쉽게 그 사람을 상처 내지 못하니까.
그래서 내가 유머러스한 글에 환장하는 걸 거야. 진지함과 유머가 조화롭게 어울려 함께 뛰어노는 글을 보면 나는 너무 부럽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서. 세상을 날카롭게 응시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워. 세상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실망만 커지고 비관적으로 되기 쉽잖아.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유머를 붙잡고 있으려는 의지. 유머엔,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는 듯하지 않니?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너가 말한 그 교수님처럼, 장영희 교수님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내 삶이 누군가에게 실망으로 다가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치 어린아이들이 어른을 생각하면 실망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얼마 전에 읽은 한 소설책에선 초등학생 조카가 이모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
"딱히 지금의 삶이 좋은 건 아닌데, 어른들을 보면 차라리 지금 여기에서 성장이 멈췄으면 해. 어른이 되는 게 끔찍이 싫어."
이제 두 살 된 내 조카가 나중에 커서 내게 저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봐. 난 내 조카가 우리 언니와 형부를 보며, 그리고 나를 보며 '어른이 돼도 좋을 것 같아'라고 생각하게 해주고 싶다. 그러려면 너 말대로 애를 쓰며 살아야겠지. 언니랑 형부한테도 열심히 애를 써보라고 할 거야.
우선은 내 표정부터 좀 바꿔야 할 것 같아. 며칠 전에 조카 옆에 있다가 나도 사진이 찍히고 말았거든. 햇살처럼 밝게 웃고 있는 조카 옆에서 멍을 때리며 앉아 있는 내 얼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어. 세상 모든 풍파란 풍파는 다 맞은 여인네가 거기 앉아있는 거야. 내가 평소에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거야, 은정아! 세상 다 산 사람의 표정이었어!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난 미소를 짓고 있다. 조카에게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목표는 이거다. 많이 웃기. 내가 많이 웃어야 조카도 많이 웃지. 이거 말이 되나. 어쨌든 주위에 많이 웃는 어른이 있는 건 좋은 거 아니겠어? 그다음 목표는 추후 더 생각해 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너도 좋은 거 생각나면 말해줘. 그때까진 우선 많이 웃을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