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이르지 못했지만

너와 얘기하고 싶어

by 황보름

잘한 선택이었어. 교사일 그만둔 거. 넌 누구보다 학생들을 아꼈지만, 학생을 아끼는 것만이 교사의 미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도 했지.


오히려 공문서 작성 잘 하고, 효율적으로 아이들을 관리하며, 또 퇴근을 하면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이 교사에 더 적합하다는 것도 넌 배웠구.


그런데 넌 그런 사람이 못 됐잖아.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완벽주의자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공문서 처리에도 완벽을 기했고, 그러면서도 아이들 하나하나를 다 맞춰주려 했구, 효율보단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아이들을 대했구, 또 집에 와서도 애들 걱정에 끙끙 댔구. 으이구. 넌 왜 쿨한 인간이 아닌 거냐!


그러니 그만두길 잘 한 거지. 교사 일 그만둔 거 앞으로 후회하지도 않을 거야. 지금 네겐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그걸 따라가다 보면 교사 일 했던 건 먼 과거의 일이 돼 있을 테지.



오늘 너, 아침부터 애썼다. 내 기운 북돋워주려고 열심히 카톡을 울려댄 거. 최근 한 2주는 정말 머리가 너무 멍했어. 목적지를 잊어버린 기차 같았다고나 할까. 막 달리고는 있는데 막상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는 마음.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 내가 보는 온 세상이 희뿌얬어. 세상이 이렇게나 희뿌여니까 내가 우는 걸 아무도 못 보지 않을까 싶어 울고 싶은 적도 많았어. 그치만 울진 않았다! 이런 마음인 걸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안 들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을 뿐.


그러다 그날 걷게 된 거야. 아침을 먹고 늦은 아침에 집을 나섰어. 목적지는 강남역. 우리 집에서 강남역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이 걸려. 그렇게 강남역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걸어올 생각이었어. 강남역에선 서점에 들렀다가 카페에서 좀 쉴 생각이었구.


걷는 행위는 몸의 치유를 가져오고 몸의 치유는 마음의 치유를 가져온다. 이 간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순환 작용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 건 내가 첫 회사에서 근무한 지 3년쯤 되던 때였어. 신기한 게, 회사원들은 왜 3,5,7년 단위로 슬럼프에 빠지나 몰라. 난 아직까지 2,4,6년 차에 슬럼프에 빠졌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넌 이 3,5,7의 오묘한 마술적 횡포가 어디에서 연유한 건지 혹 아니?


3년 차쯤 난,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엄청 뿔었었지. 그래 살쪘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회사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이돌 몸매였잖냐.(큭큭 진짜입니다.) 어느 면접에선 내 마른 몸매가 걱정된다던 면접관이 있을 정도였. 그래서 난 면접 보러 다닐 때 일부러 안에다 내복이다 뭐다 껴입고 가기도 했어. 너무 비리비리해 보일 까봐.


그런데 회사에 들어온 지 3년 만에 10키로 이상이 확 찐 거야. 뭘 그렇게 먹어 댔는지.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주임 승진을 위해 들어간 연수원에서 입사 동기들을 만났는데, 입사 동기들의 벌어진 입을 보고서야 난 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아. 연수원에서 1주일인가 2주일인가 보내면서 동기들과 이야기하며 난 내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사실 살이야 찔 수 있지. 실컷 먹고 놀다 보면 10키로야 쉽게 찌지. 근데 내 경우는 스트레스로 인해 너무 단 기간에 찐 게 문제였어. 내 불어난 살들엔 즐거움이나 흥겨움 등이 포함돼 있지 않았지. 스트레스와 분노, 짜증이 살로 육화 되었다고나 할까.


연수원에서 돌아온 후로 그래서 매일 걸었어. 퇴근 후 다섯 정거장 전에 내려 한 시간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곤 했어. 꽤 오랜 기간을 그렇게 걸었던 것 같아. 가을에도 걸었고 겨울에도 걸었어. 바닥에 얼음이 쫙 깔려 있어도 걸었고 추워 죽겠는 날도 걸었어. 그렇게 1시간 걸었다고 해서 살이 빠졌던 것 같진 않아. 걷는 동안 스트레스가 풀렸달까. 그래서 먹는 것도 자연스레 줄어들고 차차 다시 정신 상태도 안정권으로 올라서게 됐지.


물론, 너도 눈으로 봐서 알겠지만 난 그 이후 다시 예전의 몸매로 돌아가진 못했다. (ㅠㅠ) 이건 나이 때문인 것 같아...


그 뒤 걷는 내게 백신이자 처방이 됐어.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에도 걸어줌으로써 면역력을 길러주고, 몸과 마음이 상했을 때엔 후처리의 의미로 또 걸어주고.




이번에 걸은 건 처방에 가까와. 자연이 베풀어준 약을 먹는 느낌으로 걸은 거였지. 빠른 걸음으로 세 시간쯤 걸어 강남역에 도착하니까 어깨부터 해서 온 몸이 다 아프더라. 어디에라도 확 주저앉고 싶을 만큼 지치기도 했고. 바로 주저앉지는 않고 알라딘 중고 서점에 가서 이 책, 저 책 둘러봤어. 그리곤 신논현역 앞에 있는 교보문고로 가서 또 이 책, 저 책 둘러봤지.


강남역은 예전엔 그저 가끔 놀러 오는 곳이기만 했는데, 몇 년 전 내가 일했던 영어 학원이 여기에 있었잖아. 그 이후론 이곳에 오면 그냥 조금 정겨워. 이 복잡하고 화려한 자본주의의 한 복판이 정겹게 느껴질 줄 어찌 알았겠냐.


영어 학원에서 일할 때 가끔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았어. 그리고 퇴근 후 친한 학원 강사들하고 맥주 한 잔 하며 학원 사장 욕을 하는 재미도 컸어. 그래서 오늘 난 강남역으로 걸어왔던 걸 거야. 낯선 곳으로는 오고 싶지 않았거든. 뭐라도 조금은 추억할 거리가 있는 곳에 오고 싶었달까.


서점에 갔다가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어. 약간 멍한 상태로 세네 시간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창 밖을 쳐다보기도 하고, 옆에 앉은 학생이 영어 공부하는 소리도 듣고, 또 반대편 옆에 앉은 학생이 영어로 전화 통화하는 소리도 들으며, 편히 앉아 있었지.


사위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즈음 카페에서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어. 왔던 반대 방향으로. 강남역 - 교대역- 서초역- 방배역으로 쭉쭉. 오다가 생각해 보니까 내가 오늘 점심을 먹지 않았더라구. '점심을 먹지 않았네?'하고 생각하자 배가 갑자기 너무 고파왔어.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패스트푸드 햄버거집 밖에 없는 거야. 난 고기는 잘 안 먹으니 햄버거는 안 되겠다 싶었는데 배고픔에 손이 달달 떨려 어쩔 수 없이 햄버거집에 들어갔어. 그리곤 고기가 아닌 새우가 들어간 햄버거를 게눈 감추듯 먹고 나왔지.


계속 걸어서 집에 도착해 바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앞 벤치에 잠시 앉아 몸을 좀 쉬게 놔뒀어. 8시쯤이었는데 알맞게 어둡고 알맞게 시원했지. 그러면서 생각했어. 오늘 이렇게 걸었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치유되진 않 것 같다구. 내일 일어나면 또 세상에 뿌얘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그런데 어깨가 아프고 종아리가 아프고 허벅지가 아프니까 기분은 좋더라. 오늘 걸은 게 그 어떤 대단한 변화를 가져오진 않았지만 몸이 아파지긴 했으니 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몸이 아프다, 그러니 된 거다.' 논리적이진 않은 문장이지만 꽤 괜찮은 문장 같지 않아?


내가 참 좋아하는 책인데 이상하게 끝까진 읽게 되지 않는 <걷기 예찬>엔 이런 구절이 있어.


그는 자신의 두 다리를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도 감히 자신의 습관의 궤도 밖으로 나서는 모험은 하지 못한다. 끝없이 걷기만 할 뿐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것.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죽음(결국 모든 걸음으 종착점인)을 향해서 느릿느릿 다가가고 있음을 잊어버리기 위해 걷는다는 것. 잡초들이 자욱하게 웃자란 정원 안에 오솔길 하나가 천천히 만들어진다.


끝없이 걷기만 할 뿐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걷는 사람이 장님이어서 그래. 장님이 익숙한 공간에서 원을 그리며 계속 걷고 있는 거거든. 그런 그가 걷는 이유는 잊기 위해서야. 시간도 죽음도.


나도 그날 걷긴 했지만 그 어디에도 이르지 못했지. 그런데 정말 잊을 순 있었던 것 같아. 걸을 땐 나쁜 생각은 잘 떠오르지 않거든. 그러니까 나쁜 생각을 잊게 되는 거지. 그러니 더 자주 걸어야겠어. 요즘의 난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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