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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해 보이지 않으려

너와 얘기하고 싶어

by 황보름

지금 스마트 폰 배경 화면엔 반가운 숫자가 반짝이고 있다. 무려 10! 오늘 기온이 10도라는 말이야. 폰 배경화면에 지저분하게 이런저런 어플 빼 놓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 여름엔 날씨 어플을 배경화면 가운데 짱! 하고 박아 놨었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날씨는 또 얼마나 더울까 하며 폰을 확인했더랬지.


이제 더위는 뒤꽁무니만 겨우 남겨 놓고 그 모습은 거의 자취를 감춘 듯해. 우리 기억 속에만 올 해의 뜨거웠던 여름이 각자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남게 되겠지. 그리고 겨울이 오면 우린 덥다, 덥다 하며 툴툴대던 걸 금새 잊고 이젠 춥다, 춥다 하며 툴툴대겠지. 이렇게 툴툴 대다 보면 1년이 가고. 그렇게 4년이 가고, 또 10년이 가고. 그러네. 어느덧 벌써 우리가 함께 갔던 유럽 여행이 4년 전이 되었구나.


시간 참 빠르다. 흐흐. 시간 참 빠르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난 웃음이 난다. 이보다 더 상투적인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이 상투적인 말이 인생의 본질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해. 상투성의 끝이 이렇듯 본질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또 한번 웃음이 새나와. 이번엔 쓴웃음. 아무리 본질적인 인생을 살려고 해도, 결국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 떄문에. 인생은 원래 그러한 것이라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그 어떤 것 때문에.


다시 한번 말해보면, 시간이 참 빨라. 4년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 그 거리. 그 거리에서 울려퍼지던 아리랑. 서양인의 몸에서 아리랑의 선율이 재탄생되고, 그 선율에 이끌려 다가간 우리는, 그 연주가에게 왠지 모를 고마움을 느꼈지.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으니까. 평소엔 나라에 그렇게나 불만이 많던 내가 눈물이 뚝 떨어질만큼 감격에 겨워 그 모습을 지켜봤어. 여기서 또 한번 상투성이 발휘되지. 외국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 흐흐.


너말대로 그날 저녁을 먹으며 헝가리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었지. 그 전에 프라하에서도 유도인가 레슬링인가 봤던 것 같아. 그때는 한국 선수가 경기를 하는 바람에 우리의 촉이 더 예민하게 경기를 따라 갔었고. 헝가리에서의 그 환호성은 우리 기분마저 좋게 했었던 기억이야. 기분이 째지게 좋아 소리까지 지르며 열광하는 사람들 옆에서 그 기운을 무시하긴 쉽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상대편이 한국 선수였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아마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겠지. 헝가리 선수의 금메달을 축하해주긴 했겠지만, 뭔가 가슴을 쿡 찌르는 안타까움에 맥주나 한병 더 마셔버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긴 한데,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예전부터 했더랬어. 그래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고 해서 어렸을 때처럼 이젠 더는 마냥 기쁘지 않아. 나 어렸을 때 얼마나 열광적이었니. 내가 응원하는 편이 지기라도 하면 내 인생이 끝난 것처럼 시름시름 앓기까지 했지. 여기에 더해 상대팀을 얼마나 미워했게! 국가 대항 축구는 또 얼마나 좋아했고, 새벽에 일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숏트랫이니 뭐니 열심히 챙겨보기까지 했지.


그런데 이젠 내가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가 나라의 이름을 걸고 싸워 이기더라도 그때만큼 기쁘진 않아. 우리 선수만 이기게 해달라고 바라지도 않아. 만약 저 하늘위에서 누군가가 노력의 땀방울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면, 더 노력한 사람이 이기게 해달라고 빌 때는 있지. 그런데 또 한편으론 16강 까지, 8강까지 올라온 사람 중 누군들 노력하지 않았겠어. 그러니 다시 바라게 되는 건, 지더라도 그 사람이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너처럼 스포츠 보는 재미가 시들해졌다. 그래서 이번 올림픽도 별 감흥이 안 들었어. 더군다나 브라질 정치, 경제 상황까지 알고 나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더라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올림픽은 열리는가...!


다만, 올림픽이나 여타 경기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긴 해. 그 어떤 의심이나 시기 없이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응원고, 그 누군가의 성취를 축하하는 경험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그리고 살면서 이런 순수한 기쁨을 경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누군가의 성취 앞에서 난 의심스런 눈초리를 자주 보냈던 것 같아. 노력보단 환경이, 운이, 그 사람의 성취를 만들어준 것 같아서.


그런데 다른 분야와는 달리, 스포츠 경기에서만큼은 그 결과가 오로지 그 사람의 노력을 증명하는 것 같아 마음 편히 응원하게 돼. 물론 스포츠 분야에서도 잡음은 계속 되고 있지만, 적어도 노력하지 않곤, 어느 선수도 좋은 결과를 맺진 못할 테니까.


이번 올림픽에선 너가 말한 김대훈 선수가 참 멋지더라. 경기에선 졌지만 선수로선 지지 않은 모습. 결과보단 과정을, 피상적인 허울보단 본질적인 내실을 중요시하는 모습. 당당한 눈빛과 몸짓, 말투에서 느껴지는 젊음의 힘. 한국 스포츠의 노쇠한, 퇴색한 분위기를 한 순간에 덮어버리는 강렬한 순수함. 일상에서건, 스포츠에서건, 난 이렇게 당당하고 주관 뚜렷한 사람들이 참 멋져. 단호한 태도도 멋지고.


이런 태도를 지녔다는 건 이미 몇 번은 그들 삶을 가로 막는 단단한 벽을 피하지 않고, 끝내 뚫고 나왔다는 뜻이니까. 이러기가 얼마나 어렵냐!


요 며칠은 아침에 일어나면 선선하더라. 썰렁한 기운도 느껴지고. 밖에 나가면 코로 눈으로 가슴으로 가을이 들어온다. 내가 일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씨야. 요즘이. 그래서 밤마다

한 시간씩 걸으며 최대한 가을과 저녁의 어스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어디서 그러드라. 누군가가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 알 수 있는 방법 한 가지는, 그 사람이 계절의 흐름을 느끼고 있냐 있지 않으냐에 달려 있다고.


불행해지지 않으려, 누군가에게 불행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불행한 거 티내지 않으려, 그것도 아니면 정말 불행하지 않아서 난 오늘도 열심히 걸었다. 넌 어때? 오늘 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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