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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뿐인 인생인데

너와 얘기하고 싶어

by 황보름

죽음 외에는 우리 삶에서 돌이킬 수 없는 건 없다고 말하는 너의 말에 공감이 가. 사실 돌이킬 수 없는 건 수두룩하겠지. 하지만 죽음이 아닌 이상, 모든 건 끝을 의미하진 않으니까. 어찌 됐건 다시 시작할 수는 있을 테니까. 비록, 전보다 나아지진 못할지라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할지라도, 여튼, 다시 시작할 있을 테니까.


나도 기억난다. 우리 대학생이던 때.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너희 학교 사고 소식을 들었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선발대였던 대학생을 태운 고속버스가 전복됐다는 말. 사망자가 있다는 말. 너무 놀라 네게 전화를 했고, 넌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울었어.


너의 친구들이라고 했어. 친구들이 죽은 거라고 했어.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네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도 따라 울었어. 그런 나를 보며 엄마도 울었어. 그 후 넌 돌아오는 그날이 오면 학교 동기들을 만나 그 친구들을 추모하고 있지.


너한테 말한 적 있나. 우리 언니도 추모하는 친구가 한 명 있어. 너처럼 언니도 일 년에 한 번 친구들과 만나 그 친구를 추모해. 대학교 교정 어느 나무에 뿌려 둔 그 친구의 흔적을 만나러 가. 그 친구 역시 언니의 대학교 동기거든. 언니와 가장 친했던 친구. 남녀 사이를 뛰어넘은, 말이 참 잘 통했던 친구.


언니와 친구 대여섯 명이 함께 섬으로 놀러 갔었어. 대학교 엠티 때처럼 한 방에 둘러앉아 기분 좋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술도 마셨겠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가 보이지 않았대. 그런데 그게 원래 그 친구의 술버릇이었다나 봐. 학교에서 술 마실 때도 술 먹다 슬쩍 사라지는 그런 버릇이 있었다고 해.


날도 춥지 않고 바다도 잔잔하니 별 일 없을 거라 여기며 다들 잠이 들었대. 다들 술기운에 그저 괜찮다고 판단했겠지. 그런데 새벽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대. 친구가 죽었다고. 바닷가에서. 해변에 누워 잠을 자다가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을 피하지 못했다나 봐. 해변에 누워 익사한 거야.


나중에 언니가 말하길, 그 친구가 얼마 전에 그렇게나 원하던 회사에 취직이 됐었다고 하더라. 오랫동안 좋아하던 여자의 마음을 받아내 마침내 사귀게도 됐대. 그래서 무지 행복해하고 있었대. 그러면서 언니가 말했어.


"죽은 준혁이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어. 웃는 것도 같았고. 그건 다행이더라. 힘들지 않게 죽은 건."


언니는 며칠 앓았어. 내내 울었어. 그리고 며칠 후 회사에 출근을 했어. 앓으면서 생활했어. 한 1년간 옆에서 보는 사람이 괴로울 만큼 힘들어했어. 오랜 시간 언니의 컴퓨터 바탕 화면은 그 친구 사진이었어.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언니 핸드폰 뒷자리는 그 친구가 죽은 날이야.


그러다 1년쯤 지났을 때부터 괜찮아졌던 것 같아. 다시 예전처럼 언니는 잘 지냈지. 워낙 밝고 사려 깊은 성격이니 언니가 주위 사람들을 위해 노력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정말 이젠 괜찮아진 거야. 이제 더는 그 친구를 추억하면서도 울지 않고, 친구들과도 웃으면서 그 친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너도 알다시피 나와 언니는 싸우질 않아. 내가 여러 번 말했다시피 언니는 나의 제2의 엄마야. 겨우 두 살 차이인데도 언니는 날 딸처럼 여겨.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봐주고, 마냥 짜증을 내도 봐주고, 내 기분에 맞춰 조심스레 행동해주고, 또 날 이뻐하지.


그럼에도 우리는 아주 속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는 자매는 아니야. 마주 앉아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거의 없어. 그저 아주 가끔 너무 힘이 들 때 서로 자문을 구하는 정도. 그럼 상대방은 온 마음을 다해 진지하고 진솔하게 자기 생각을 전하는 정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보는 관계인 건데... 그래서 난 언니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오가는지 잘 몰라. 그저 언니의 삶을 통해, 행동을 통해 어림짐작할 뿐이지. 그런데 '어림짐작'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아. 언니는 그리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라서 하나의 생활 방식이나 행동 패턴을 몇 년에 걸쳐 이어가니까.


그래서 난 언니에게 궁금한 게 별로 없었는데, 작년엔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할 시간을 갖게 됐어. 언니와 나는 같은 듯하면서 참 많이 달라. 매번 습관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혼자서 안달복달하는 나와는 달리, 언니는 늘 느긋하고 여유롭다고나 할까. 나는 가끔 정말 별 것도 아닌 일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고 분노가 치솟는데, 언니는 대체로 연하지.


지난 몇 년 간 언니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언니와 형부는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 이건 정말 보통일이 아니잖아!? 화가 날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늘 밝고 애교 넘치는 언니는..., 정말 나와는 참 다르지? 후후.


그래서 작년에 언니에게 물어봤어. 언니는 늘 삶에 만족해 보인다고. 흔들리지도 않아 보인다고. 하나의 사건에 일희일비하지도 않고. 그게 무언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보다 더 높은 기준을 두고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언니가 짧게 대답하더라.


"그건 잘 모르겠네. 근데 난 준혁이 죽은 이후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우리는 누구나 하루아침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냥, 누구나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뭐가 그리 대수인가 싶어. 그냥 오늘 하루 즐겁게 열심히 살면 되지."


나는 그때 언니는 그 친구를 잊은 게 아니라, 가슴 깊이 묻어둔 거라는 걸 알게 됐어. 그리고 그 친구의 죽음이 언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위의 첫 문단에서 내가 한 이야기를, 한번 뒤집어 볼까 해서야.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맞아. 그리고 죽음은 끝을 의미하지. 그런데 언니 친구의 죽음이 언니에게 영향을 미쳤잖아. 그리고 그 영향이 형부에게 영향을 미쳤고, 내게도 미쳤고, 내 조카 고득이에게도 오랜 시간 미치겠지. 나는 그래서 한 사람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서 절망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영향을 끼친 사람들 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난 우리가 절망을 해야 한다면, 그건, 우리의 죽음에 있는 게 아니라 삶에 있다는 생각이야.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영향을 미치게 될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의미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삶. 이런 삶이 절망스러운 것 아닐까.


가끔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정말 별의별 나쁜 사람들이 다 나와. 온갖 거짓말에 온갖 암투에 온갖 허세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난 생각해. 한 번뿐인 인생인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삶을 저들은 살고 싶을까. 한 번뿐인 인생인데, 조금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한 번뿐인 인생인데, 뭐가 그리 대수일까. "그냥 오늘 하루 즐겁게 열심히 살면 되지".


한 번뿐인 인생을 나는 어제도 그닥 잘 살지 못했고, 오늘도 그럴 테지. 그래도 한 번뿐인 인생이니까 느리더라도 아주 조금씩 더,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자고 나를 독려하고 싶어. 하아, 나의 이런 '목표'는 나를 또 '안달복달'하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문득 또 궁금하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좋은 삶은 또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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