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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

한 여자가 감당해야 했던 사랑

영화 <로즈>

by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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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로즈의 모습.

ⓒ BoXoo 엔터테인먼트


1943년, 아일랜드의 작은 시골 마을 발리티반에 로즈(루니 마라)가 돌아온다. 2차 세계대전을 피해 프룬티 이모를 찾아온 로즈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자다. 도도하고 새침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특히, 그녀의 파란 눈빛을 마주한 남자들은 속절없이 마음이 흔들리고 만다.


마을의 젊은 남자들 사이에 로즈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 눈짓 하나하나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어 마을 골목 골목으로 흐른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질수록 로즈의 삶은 속박되기 시작한다. 로즈의 매력은 서서히 하나의 빌미가 되어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위선과 기만이 넘치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마을. 스스로 자신의 태도를 점검하고 타인을 감시하며 이질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 마을. 이런 마을에서 로즈는 이방인이다. 빈틈을 보이지는 않지만 경계하지도 않고, 말이 많진 않지만 할 말은 하는 여자. 억압적이면서 여성차별적인 공간에서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로즈는 마을을 배신하는 것이다.


로즈가 왜 마이클(잭 레이너)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왜 사랑하게 됐는지, 왜 평생을 기다렸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많은 걸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마이클이어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다른 남자들과의 차이 때문. 마이클만이 로즈를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 기다려주었다는 것. 로즈가 원할때에만 마이클도 원했다는 것.


반면, 아름다운 로즈를 향한 다른 남자들의 시선은 부담스럽고 불쾌하기만 하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로즈가 있는 곳만 찾아다니며 로즈를 궁지에 빠뜨리는 곤트 신부. 한 번의 데이트에 제멋대로의 의미를 부여한 채 급히 사랑을 갈구하며 억지로 키스하려는 잭. 남자들은 로즈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욕구를 분출하기에만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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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트 신부와 로즈. 곤트 신부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비극은 욕구에 사로잡힌 남자의 사회적 지위에 있다. 평판과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권위자의 말이다. 권위자가 하는 말은 그 자체로 진실이 되어 사람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지워버린다. 절대적 권력자였던 곤트 신부의 소유욕은 마치 허공에 떠도는 불순물처럼 로즈 주위를 떠돌다 그녀의 삶을 가차없이 포획한다. 로즈를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신부의 말 한마디로 로즈의 삶은 파괴된다.


곤트 신부는 기어코 로즈를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는 누명까지 쓰고 50년을 정신병자로 살아가야 했던 로즈. 한 사람의 거짓말에 의해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로즈는 홀로 늙어가고 있다. 병원이 헐리고 호텔이 들어서게 되어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기 직전, 로즈는 이송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런 로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린 박사(에릭 바나)에게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털어 놓는다. 그린 박사는 로즈의 말을 믿어줄까.


사랑이 아닌 사랑 후의 이야기에 치중한 영화다. 두 연인의 감정선은 다소 아쉬웠지만 감독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여자에 집중하기 보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감당해야 했던 현실, 역경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반전 또한 예상 가능했으며,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매력이 넘친다. 주인공 로즈를 맡은 루니 마라의 매력 때문. 남자들이 왜 그녀에게 빠져드는지 따로 설정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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