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보름 Jul 01. 2019

[드로잉 1일] 지우개로 지우지 않는다

지난 주에 만화책 한 권을 주문했다. 어쩌면 내 생에 처음으로 사는 만화책인지도 모르겠다. 작년까지 우리 집엔 만화책 한 권 - 꽃보다 남자 26권 -이 있긴 했다. 나는 산 기억이 없으므로, 아마 누군가에게 받았거나 친구 집에서 훔쳐온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만화책을 따라 그리기로 했다. 인체 표현을 잘 하고 싶어서 생각해낸 방법이다. 사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싶다. 그러니까,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비스듬히 앉아 있거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서 있거나 전화를 받거나 숨을 헉헉 내쉬거나 하는 모습 등등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그림을 망쳤더라도 멈추지 말고 계속 그리기로 했다. 오늘 그린 그림에서 남자 주인공은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잡은 채 전화를 하고 있고 다른 손은 하늘을 향해 쭉 뻗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상황. 머리는 헝클어졌고 눈썹은 위로 치켜 올라갔으며 입은 하품을 한다. 팔을 올린 탓에 티셔츠가 따라 올라가서 배꼽과 팬티 끝부분이 보인다. 아무리 그림이라지만 배가 하나도 없네? 


말로는 이렇듯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내가 완성한 그림은 정말이지 허접하다. 얼굴 형태부터 어색하고(아무리 어색해도 지우개로 지우지 않는다), 감은 눈과 그 위의 눈 썹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도 끝을 본다는 생각으로 코도 그리고 쩍 벌린 입도 그리고 그 안에 이빨과 혀도 그려 넣었다. 늘어진 티셔츠 목 둘레 안 쪽으로는 쇄골도 그려 넣고, 티셔츠 여기저기에 구겨짐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팔과 손도 그렸다.  


예전에 한 이틀인가. 손가락만 내리 그려본 적이 있는데 겨우 이틀로는 아무 것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손가락, 손, 팔 같이 기본 중 기본인 것들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겠다. 가만이 생각해보면 나는 늘 내 손을 보고 있는데, 늘 보고 있으면서도, 그 형태를 짐작도 못하고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림을 계속 그리다보면 나는 내 몸의 형태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까. 계속 그리다 보면, 그를, 그녀를, 잘 그릴 수 있게 될까. 


보름의 인스타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 20분 나는 한다]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