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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02. 2019

[드로잉 2일] 뒷모습만 봐도

우리의 남자 주인공이 학교에 가기 위해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개찰구 앞이 부산하다. 삑삑삑삑삑. 쉴 새 없이 카드 찍히는 소리가 들린다. 사십 대 중반의 남자가 회사에 가는 길인지 반팔 정장에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앞으로는 칠십 대 후반의 할아버지가 챙이 있는 모자에 개량한복을 입고 있다. 할아버지 앞으로는 삼십 대 중반의 여성이 큰 백팩에 반바지를 입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오십 대 후반의 남자가 구부정한 자세로 걸음을 옮긴다. 맨 오른쪽 개찰구 앞엔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이 짧은 바지를 입고 순서를 기다린다. 이들 앞으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바삐 제 갈길로 흩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 내가 그린 한 장면을 문장으로 서술해봤다. 실제 그림보단 디테일이 조금 모자라다. 이를테면 사십 대 중반의 남자가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멨다든지, 삼십 대 중반의 여자가 단발머리라든지, 이십 대 후반의 여자가 옷을 세련되게 잘 입었다든지 하는 디테일들. 


문장으론 이렇게 길게 써야 하는 정보들이 그림으론 단 한 장면으로 묘사된다.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그림 속 이 모든 정보를 인지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을 테고,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충 '아 개찰구 앞에 사람들이 많네' 하는 정도만 파악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가 얼마만큼의 정보를 받아들이든, 그리는 사람은 인물 하나하나를 정성껏 묘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이든 디테일은 중요하니까. 


작가가 그려놓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 놀랐다. 뒷모습만으로도 나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딱 봐도 나이가 보였다. 사십 대 중반이라고 짐작한 남자의 경우. 우선 몸의 형태가 일주일에 회식을 한 번 이상은 하는 형태이다. 일 하느라, 육아하느라 운동을 못 한지도 꽤 오래되었을 것 같다. 옷에서도 나이가 유추 가능하다. 요즘 이십 대, 삼십 대 남자들은 이렇게 커다란 반팔 정장을 입지 않으니까. 머리 모양도 그렇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그렇지만, 그냥 아저씨 머리. 내가 너무 색안경을 끼고 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젠 이 남자의 팔뚝 마저 사십 대 중반의 팔뚝처럼 보인다. 


분명, 나이별 몸의 형태와 그 나이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이런 디테일들에도 관심을 기울여야겠지. 스물한 살의 몸과 스타일, 스물아홉 살의 몸과 스타일, 서른아홉 살의 몸과 스타일, 마흔아홉, 쉰아홉 살의 몸과 스타일은 모두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니 문득 제 나이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매의 눈을 가진 작가들에겐 아무리 감추려 해도 우리는 정확히 우리 나이로 보일 것만 같으니까. 그림 그리는 모든 작가님들, 리스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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