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2일]
1.
타고난 감각과 센스가 뛰어난 그녀의 추천을 나는 신뢰하는 편이다. H는 꽤 까다로운 취향을 갖고 있어서, -센스 없는 음악이 시끄럽게 반복된다던지, 인테리어와 분위기가 조금 모자란 느낌이라던지, 커피나 음식이 맛이 없다던지, 그렇다고 과하게 '나 비싸고 고급진 럭셔리야'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공간이라던지를 싫어한다- 그녀가 좋다! 고 하는 곳은 대게 좋았다. 오늘 우리는 알라딘에 책 다섯 권을 팔고, 홍대 입구 역의 긴 터널을 걸어 어느 편집샵에 다녀왔다. 언니랑 가고 싶은 카페가 있는데, 여기서 멀어. 근데 좋아. 디자인이 피곤하게 과하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선을 지키는 매력이 있는 공간인데,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도 않아서 좋아. 그래, 좋아, 멀면 버스를 타고 가자. 나는 네가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여태까지 늘 그랬어. 너의 취향을 믿어.
취향이 확실한 사람과의 대화는 즐겁다.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지 않을 때,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겁내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좋은 것을 향한 합의는 더 빨리 이뤄지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서로를 응원한다. 이 아이의 빛나는 재능과 이야기가 어서 마무리를 한 번 맺으면 좋겠다. 그 다음은 조금 더 나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네가 사준 새 액정 필름을 붙였더니, 3년이나 된 내 폰이 새 것 같아졌어. 고마워.
2.
한국에 왔다는 소식이 적힌 SNS를 보고 제일 먼저 보자고 한 사람이 Z 언니다. 친구가 몇 명 남지 않은 내게는 이런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하다. 벌써 네 살짜리 딸의 엄마가 된 언니는 예전 그대로 이기도, 조금 달라지기도 했다. 대기업의 경력직원으로서, 대한민국에서 살아나가는 직장인으로서, 누군가의 동료로서, 어느 가족의 엄마이자 아내로서, 그리고 여전한 나의 친구로서. 직장인과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려면 조금은 서둘러야 한다. 신입은 이미 벗어난 그녀가 게스트를 위해 가용 가능한 점심시간은 11시 반부터 1시 까지. 우리는 11시 25분, 언니의 회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뒷좌석에 아기용 카시트가 있는 언니의 차는 한껏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엄마와 엄마가 아닌 사람의 어른 능력치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 11시 반부터 줄을 선다는 맛집에 안착해 약 한 시간 가량의 안부를 나눴다. 우리는 밥값과 최신(?) 디자인의 네덜란드산 초콜릿을 교환했고, 언니는 나를 다음 약속 장소에 갈 수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태워다 주었다. 안녕, 우리 또 만나자. 짧지만 즐거웠어.
3.
C 선생님은 내게 특별한 사람이다. 지난한 (무려) 두 번째의 대학 생활에서 가장 큰 활력을 불어넣어 주신 분. 언제나 life is short/인생은 짧아요 라며 스파르타식 교육에 지쳐있는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작업을 하라고 하셨다. 외국인의 사고방식은 원래 저런 건가. 매 수업마다 학생들의 자유도를 한껏 높이는 선생님의 신선한 접근법이 너무 좋아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일분일초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1학점이었는지 2학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3학점이 아니었던 전공 선택 과목에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휴학을 하던 학기에도, 성적과 학점을 받지 않아도 좋으니 선생님의 수업만은 종강까지 듣게 해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내가 무리하지 않을 수 있다면 괜찮다고 허락해주셨다. 생각했던 만큼 잘 마무리하지 못해 많이 부끄러웠지만, 강의 첫 학기였던 그의 수업은 지금까지도 내게 가장 재미있었던 수업으로 남았다. 물론 가장 나다운 결과물도 함께.
오늘 선생님의 전시 오프닝이 있었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나를 기억하실지도 확신할 수 없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기막히게 맞은 이 타이밍에 신이 나서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었다.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에서 선생님과 눈을 마주쳤다. 하하하.. 혹시, 저를 기억하실까요? 하는 마음을 눈빛으로 전해 본다. 어, 오,, 아...!!! 네, 제가 그 학생이 맞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신다고 했다. 그때의 학생들은 많이 기억하진 못하지만, 몇 몇과 나는 기억하신다고. 가끔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고 하셨다. 설사 반쯤의 인사치레라도 상관없다. 선생님이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셨다는 말이 너무 좋아서 한껏 웃음이 났다. 생각해두었던 말을 한다.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요즘 네덜란드에 살아요. 내일모레가 출국인데 우연히 SNS에서 전시 포스터를 보고 왔어요. 선생님은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다. 젠틀하고, 친절한 사람. 내가 제일 좋아하던 선생님. 가을쯤에 네덜란드에 학회 때문에 오실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으아, 정말요? 또 뵙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시간이 없으니 밀린 숙제를 하듯 한꺼번에 세 사람을 만났지만, 사람에게서 기운을 얻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돌아가면 할 일이 늘었다. 앞으로도 더 오래 자주 웃으면서 그들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