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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04. 2019

[드로잉 4일] 이어폰

우리의 주인공이 지하철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다. 무슨 음악을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무 음악도 듣고 있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얘는 그럴 만한 애다. 누가 말을 걸지 못하도록 아무 소리도 안 나는 이어폰을 계속 끼고 다닐만한 애.


이어폰이 뭐라고. 이걸 잘 못 그리겠다. 매 장면마다 이어폰을 그려야 했는데, 제대로 그린 것이 없다. 이론 상으로는 간단하다. 줄을 양 귀에서 매끄럽게 내려오게 한 뒤 Y 자 모양으로 만나게 하고는 아래로 가볍게 쭉 늘어뜨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림에 가장 어려운 건 뭘까. 아직 고난도 표현은 엄두도 못 내는 내게 가장 어려운 건, 선 그리기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선을 주욱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는 나름 꽤 됐다. 5년쯤 됐나. 문득 글을 쓰고 싶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나는 그게 무엇이든 기본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우선 선 그리기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스케치북 한 권을 사서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선을 긋기 시작했다. 선을 제대로 그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스케치북을 반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지금은 그림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쏟을 때가 아니다, 이 시간에 책 한 줄이라도 더 읽자, 한 문장이라도 더 쓰자, 라는 핑계. 스케치북 한 장에 새까맣게 줄을 긋는 시간은 그래 봤자 10분 정도였을 것이다. 스마트폰엔 1시간도 뚝딱 쓰면서, 고작 10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아까워하다니.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줄곧 어리석다.


5년 전에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이어폰쯤은 눈 감고도 그렸을 것 같은데,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붙잡고 있다. 그래도 지금의 내가 5년 후의 나를 붙잡지 않을 수는 있겠다. 잘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데 쓰는 시간을 아까워하지만 않는다면. 오늘은 이 글을 쓰고 선 그리기 연습을 좀 더 해봐야겠다. 조그마한 드로잉 북 한 바닥에라도 선을 새까맣게 그려봐야지. 다 그리는데 3분쯤 걸릴까. 23분. 오늘 내가 그림을 그린데 쓴 시간이다.


이왕 한 김에 두 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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