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인공이 지하철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다. 무슨 음악을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무 음악도 듣고 있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얘는 그럴 만한 애다. 누가 말을 걸지 못하도록 아무 소리도 안 나는 이어폰을 계속 끼고 다닐만한 애.
이어폰이 뭐라고. 이걸 잘 못 그리겠다. 매 장면마다 이어폰을 그려야 했는데, 제대로 그린 것이 없다. 이론 상으로는 간단하다. 줄을 양 귀에서 매끄럽게 내려오게 한 뒤 Y 자 모양으로 만나게 하고는 아래로 가볍게 쭉 늘어뜨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림에서 가장 어려운 건 뭘까. 아직 고난도 표현은 엄두도 못 내는 내게 가장 어려운 건, 선 그리기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선을 주욱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는 나름 꽤 됐다. 5년쯤 됐나. 문득 글을 쓰고 싶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나는 그게 무엇이든 기본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우선 선 그리기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스케치북 한 권을 사서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선을 긋기 시작했다. 선을 제대로 그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스케치북을 반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지금은 그림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쏟을 때가 아니다, 이 시간에 책 한 줄이라도 더 읽자, 한 문장이라도 더 쓰자, 라는 핑계. 스케치북 한 장에 새까맣게 줄을 긋는 시간은 그래 봤자 10분정도였을 것이다. 스마트폰엔 1시간도 뚝딱 쓰면서, 고작 10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아까워하다니.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줄곧 어리석다.
5년 전에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이어폰쯤은 눈 감고도 그렸을 것 같은데,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붙잡고 있다. 그래도 지금의 내가 5년 후의 나를 붙잡지 않을 수는 있겠다. 잘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데 쓰는 시간을 아까워하지만 않는다면. 오늘은 이 글을 쓰고 선 그리기 연습을 좀 더 해봐야겠다. 조그마한 드로잉 북 한 바닥에라도 선을 새까맣게 그려봐야지. 다 그리는데 3분쯤 걸릴까. 23분. 오늘 내가 그림을 그린데 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