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그린 여자는 단발머리다. 앞에서 봐도 예쁘고, 옆에서 봐도 예쁜 머리다. 나도 가능하다면 이런 머리 모양으로 평생을 살고 싶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약간 컬이 들어간 이런 단발 머리를 나는 할 수 없다. 곱슬 머리의 비애이다. 매직으로 머리카락을 쭉쭉 펴는 것 외엔 내 머리엔 그 어떤 스타일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 여자는 얼굴 표정에서부터 서 있는 자세, 매고 있는 가방 등등 모든 것이 내 스타일이다. 이런 분위기의 여자가 여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지금 내가 읽는 만화책 여주인공의 외모는, 흠, 딱 남자들이 좋아할 만하게 고전적이다. 마치 손예진 주연의 드라마 <여름 향기>에나 나올법한 여자. 그러니까 외모만은 과거의 여자다.
나는 요즘 이 여주인공처럼 머리를 하고 다니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가르마는 7:3. 여자는 7쪽 머리를 커튼처럼 앞으로 내리고 있다. 3쪽 머리는 귀 뒤로 넘겼는데, 깔끔하게 넘긴 것도 아니다. 다 넘어가지 못한 머리가 귀 주변을 거미줄처럼 감싸고 있다. 커튼과 거미줄. 바로 이 커튼과 거미줄 덕분에 여자의 분위기가 어딘지 예스러우면서 낭만적이게 연출된다. 머리 모양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단역 배우는 현재의 여자다. 단발머리가 자연스럽게 여자의 얼굴을 감싸준다. 여자는 깔끔하게 떨어지는 긴 블라우스를 무릎 위로 15센티 정도 되는 치마에 넣어 입었다. 왼쪽 어깨에 맨 가방은 큼지막해서 책도 다섯 권 이상 들어갈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여자가 한 손을 치마 주머니에 넣고 있다는 것. 어딘지 시크하면서도 멋스러운 것이 진짜 지하철 역에서 이런 여자를 봤다면 나도 모르게 힐긋 쳐다봤을 것 같다. 너무 예뻐서가 아니라 그냥 내 스타일이라서.
단발머리를 예쁘고 그리고 싶어서 오늘은 유독 천천히 선을 그었다. 머리 끝이 안으로 말려 들어간 것도 있고, 밖으로 뻗친 것도 있어서 나름 디테일에도 신경 썼다. 특히 예쁜 옆모습도 정말 잘 그려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입 그리기에서 망한 뒤로는 집중력이 떨어져 머리도 망해버렸다. 만화책에선 어딘지 피곤한 듯 쓸쓸해 보이던 여자의 옆모습이, 내가 그린 그림에선 그냥 삐친 여자의 옆모습이 됐다(입을 삐죽 튀어나오게 그렸다). 내가 그녀 고유의 이미지를 망쳐버린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녀 또한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해해줄 것 같다.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종류의 여자는 원래 이해심이 꽤 깊은 걸로 유명하니까 말이다(제가 주머니에 손을 잘 넣고 다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