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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07. 2019

[드로잉 7일] 일요일 아침

몸은 피곤했지만 더 잤다간 아무래도 2시간이 순삭 될 것 같았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8시가 조금 넘어 있다. 이제 일어나야 한다. 5분만 더 뒹굴대다가 일어나야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어제 일을 생각해봤다. 무려 1년 반 만에 만난 지인 두 분과 맥주를 맛있게 마셨다. 다 좋았는데, 언제나처럼 이런 생각이 든다. 아, 그 말은 하지 말 걸. 상대방은 다 잊었을 말들을 나는 단지 내가 했다는 이유로 곱씹고 있는 중이다. 이불킥을 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2시간이 순삭 되든 말든 더 누워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일요일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한다. 하루 종일 내 몸과 마음과 생각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다. 침대 옆 테이블에 책을 한 권 놓아두고 온종일 그 책을 읽는다. 온종일 읽었는데도 100페이지 남짓뿐이 못 읽기도 한다. 몇 페이지 읽다가 스마트폰을 하고, 또 몇 페이지 읽다가 예능 프로그램 다운로드하여 보고, 또 몇 페이지 읽다가 잠깐 밖에 나간다. 이렇게 쉬어야 일요일 저녁때쯤엔 이런 생각이 든다. 내일은 뭘 하지.


하지만 오늘은 예외의 일요일이다. 우선 약속이 있다. 약속도 불행과 마찬가지로 한 번 몰려오면 끝없이 몰려오는 것만 같다. 없을 땐 고립감이 느껴질 만큼 없다가, 있을 땐 몸을 사리게 될 만큼 있다. 이번 주가 그랬다. 계속 약속이 있었다. 조금이나마 긴장을 해야 하는 약속들도 있었다. 나는 긴장할 땐 나도 놀랄 만큼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데, 아무 말 대잔치가 성대하게 끝나면, 물론 꼭 후회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날 미워할 만큼 후회하진 않는다. 그냥 다음엔 너무 긴장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뿐.


오늘은 약속도 있을뿐더러, 꼭 해야 할 일도 있다. 이제 당분간은 일요일에도 마음껏 쉴 수 없게 됐다.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그렇다고 한숨이 난다거나 부담이 느껴지진 않는다. 반대로 지금까지의 일요일이 너무 무료했었다는 신박한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자, 그렇다면 오늘은 언제 그림을 그려야 할까. 벌써 며칠 전부터 나는 '이번 일요일엔 아침에 그림을 그려야겠다'라고 생각해뒀다. 밖에 나가기 전에 미리 그려 놓아야, 아무래도 시간 신경 쓰지 않고 제대로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8시 20분쯤 일어나 내용 없는 말을 하듯 내용 없는 행동을 하다 보니 어느새 10시가 넘어 있었다. 2시에 약속이 있으니 집에선 적어도 1시엔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12시엔 나갈 준비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 그림 그리는 데는 20분, 그림을 그리고 나서 글을 쓰는덴...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이젠 더 늦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진하게 타면 속이 쓰리므로 옅게 탄 아이스커피와 만화책, 드로잉 노트, 연필을 준비해놓고 시간을 보니 10시 22분이었다. 자, 오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시간이다. 일요일 아침의 그림. 42분까지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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