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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08. 2019

[드로잉 8일] 구경하기

예전에 어느 책에서 어느 작가가 이런 투정을 하는 걸 읽은 적 있다. 작가는 음악가나 화가에 비해 참으로 불리하다는 것이다. 만약 기타리스트라고 치면 그 사람은 기타를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기타리스트라는 것을 뽐낼 수 있다. 만약 화가라고 치면 화구통이라도 어깨에 메고 다니며 자신이 화가라는 걸 뽐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어떤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작가라는 걸 뽐낼 방법이(사실 꼭 뽐낼 필요 무엇이랴!).


여기에 더해, 작가가 불리한 경우를 나는 하나 더 안다. 예를 들면, 다시 기타리스트라고 치자. 무대라고 치자. 튜닝 중이라고 치자. 기타리스트가 기타 줄 몇 개를 튕기며 '디링, 디링, 디링' 소리를 냈다고 치자. 그러면 관객은 '오~와~꺅~'하면서 본인들이 방금 들은 아름다운 선율에 감응하며 호응을 해준다. 그렇다면, 화가는 어떨까. 마찬가지다. 스케치북이 있다고 치자. 화가가 연필을 들었다고 치자. 그냥 단순한 선 하나를 그렸다고 치자. 그러면 관객(?)들은 그 선을 보며 감탄하게 된다. 와, 어떻게 저렇게 매끈하게 선을 그을 수가 있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 여기 작가가 한 명 있다고 치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치자. 문장 하나를 썼다고 치자. 만약 누군가가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다고 치자. 과연 관객들은 작가가 문장 하나를 겨우 써내는 걸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 과정은 '쇼'로서 큰 재미가 없는 게 사실이다. 글은 결과로만 말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그냥 자기 방에 틀어박혀 홀로 글을 쓸 뿐이다. 글을 다 쓰기 전엔 글을 뽐낼 방법이 없으니까.


글을 이렇게 시작한 건, 나도 오늘 엄마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했기 때문이다(참고로, 엄마는 내가 글을 쓰는 모습을 구경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 글을 쓰는 과정은 구경할 만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스케치북에 엄마가 아슬아슬하게 선을 긋은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엄마는 예상보다 더 과감하게 선을 그었다. 선을 긋다가 지우개로 지우기도 했지만 대체로 한 번 그은 선은 되도록 지우지 않고 고수하는 스타일이었다. 엄마가 선을 긋는 모습을 보며 내가 오, 잘 그리네, 하고 말했더니 엄마는 쑥스러워하며 그러니? 하고 물었다.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아 큰 소리로 응, 하고 대답했다.


누군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나는 가끔 유튜브에서 내가 구독하는 화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한 시간 동안 구경하고는 한다. 마냥 신기하다. 선도 쓱쓱쓱 그리고, 색칠도 쓱쓱쓱한다. 뭔가 무심하게 하는 행동들이 결국엔 운치 있는 그림이 된다.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을 그 화가가 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엄마다. 엄마가 일주일에 하나씩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일처럼 기쁘다. 엄마는 지금 스위스 마테호른을 그리고 있다. 다 그려놓고 나와 아빠에게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조금 더 진하게 색칠해야 하는 부분을 지적하고, 아빠는 전체적인 구도를 지적한다. 엄마는 처음에는 조금 기분 나빠하다가 결국에는 우리말에 수긍한다.


엄마에게 색을 지적하고 들어와서 나도 내 그림을 그렸다. 그러자 엄마가 따라 들어와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구경한다. 나는 엄마에게 말한다. 만화책을 보고 따라 그리는 거야. 아무 생각 없이. 엄마는 '흐응' 비슷한 소리를 내며 잠시 내 그림을 구경하다가 마치 불꽃놀이라도 구경한듯 기분 좋은 표정으로 돌아 나간다. 내가 그림에 관심을 갖고 나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아무리 못 그리는 그림이라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 그 자체는 보기에 참 좋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엄마가 그림 그리다 자리 비운 사이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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