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별로 타지 않던 내게도 최근 몇 년간의 더위는 정말 곤혹스럽다. 어떻게 이렇게 더울 수 있을까 싶다. 나는 분명 길을 걷고 있는데 마치 에어컨 실외기 앞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땀이 너무 많이 나 당황한 적도 여러 번이다. 며칠 전에는 걷다 보니까 티셔츠 배 부분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이젠 땀이 나다 나다 별 데 다 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게 슬쩍 티셔츠를 들고 걸었다.
2050년 즈음엔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봤다. 지구 멸망의 원인은, 당연히 (탐욕스러운) 인류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인류가 원망스럽지만, 그렇다고 나 역시 지구를 위해 뭘 한 적은 없으니 딱히 할 말은 없다. 지구를 위해 하고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텀블러를 들고 다니며 종이컵 사용을 줄이는 것뿐이 없으니까. 나는 가방에 텀블러를 들고 다니며 배에선 땀을 흘리는 인류의 일원이다. 그리고 그 일원은 30년 후의 일은 잠시 잊고, 오늘도 그림을 그렸다.
우리의 주인공도 더워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티셔츠 어깨 부분을 잡고 흔들며 바람을 만들면서 땀을 식혀보더니, 이것만으로는 안 됐는지 이젠 아예 티셔츠 뒷부분을 노골적으로 펄럭였다. 여건만 된다면 얼른 만화책 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티셔츠를 들고 있는 사이 미니 선풍기를 등에 쐐 주고 싶을 만큼, 마음 아픈 장면! 실은, 내가 자주 그런다. 집에서 밥을 먹다가 땀이 나면 미니 선풍기를 티셔츠 안으로 넣어 배에 바람을 쐔다. 아, 그럼 정말 시원하다.
티셔츠를 손으로 잡고 펄럭이는 모습을 표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똑같은 모양의 손을 여러 번 겹쳐 그려주면 된다. 손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여기에다가 손을 흔드는 방향으로 선을 몇 개 날렵하게 그려주면, 아무리 눈썰미 없는 사람이어도, 아 지금 얘가 손을 흔들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된다. 물론 이것도 그림을 잘 그려야 이렇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아마 누군가가 내 그림을 봤다면, 그가 아무리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도 내가 그림을 잘못 그려 그 위에 덧그린 줄 알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아직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30년은 더 그림을 그릴 마음의 준비가 돼 있기 때문에(정말?). 물론, 30년 동안 매일 20분씩 그릴 수는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