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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14. 2019

[드로잉 14일] 기억 조작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에 관한 얘기를 부모님과 주고받았다. 어쩔 수 없이 온갖 과거일을 매달고 우리에게 도달한 그 소식으로 아마 며칠간 부모님 속은 타들어갈 것이다.


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아침도 거른 채 그림을 그렸다. 최근에 내가 본 가장 청량한 느낌의 포스터를 골랐다. 아직 우리나라엔 개봉 안 된 영화의 포스터다. 아마 영원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이나 대만에서 유독 잘 만드는 첫사랑 영화를 기억 조작 영화라고 한다. 나에겐 그런 첫사랑이 없었는데, 그런 학창 시절이 없었는데, 그 영화들을 보면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해서다.


그 시절 내겐 없던 첫사랑을 소환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구도를 미리 잡고 그리면 그림의 완성도는 올라가겠지만, 나는 그냥 대충 어림잡은 위치에 남자 얼굴부터 그리기 시작다. 얼굴 크기에 따라 어깨 넓이를 조정해야 할 테고, 어깨 넓이에 따라 이후 모든 선은 달라질 것이다. 결국 남자의 다리를 끝까지 그리지 못했다. 여자의 다리도 마찬가지다. 마음 같아선 손으로 터치해 이 그림들을 아주 살짝만 위로 올려놓고 싶다.


이런 영화를 본다고 해서 기억 조작이 영원 할리는 없다. 영화의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우리의 없던 첫사랑은 영원히 없는 것으로 된다. 그 시절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옥상에서 기타를 쳐주지 않았다는 건 나도 알고 그 누구도 알고 초신성도 알고 내 친구들도 안다. 그래도 이런 영화를 가끔 찾게 된다. 살다 보면 잠깐이라도 판타지에 빠져버리고 싶은 때가 있으니까. 우리가 영화를 보고 또 보는 이유겠지.


그림을 다 그렸더니 40분이 말끔히 지나있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나 하기 싫은 생각을 하기 싫을 땐 그림을 그리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늘 나머지 시간은 천천히 흐를 것 같다. 어쩌면 그림을 또 그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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