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넷플리스 오리지널 드라마 <Anne with an E>에서 우리의 빨강머리 앤을 그려보기로 했다. 초록창에서 이미지를 검색하다 하나 골랐다. 앤이 홀로 바닷가 절벽에 서 있는 장면. 오래전에 본 터라 이 장면이 어느 맥락과 이어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앤, 참 예쁘다.
얼굴 선을 그리고 가장 먼저 눈을 그렸다. 앤이 위를, 어딘지 모를 위를, 그녀의 마음이 가리키는 곳인 저 위를 올려다보고 있지만 내가 그린 눈은 위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린 눈이 예뻐서(이런 부심을 자주 느껴야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되지 않을까요?)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앤의 눈은 참 예쁘다. 크고 파랗고 쌍꺼풀도 짙다. 여성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 속눈썹도 정말 예쁘네. (벌써 예쁘다는 말을 네 번이나 했다.)
그리다 보니 새삼 앤의 이마가 참 넓다는 걸 알게 된다. 물론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터라 더 넓게 보이는 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참 시원하게 넓다. 이마를 시원하게 그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머릿결을 그려 넣었다. 예쁜 빨강 머리가 바람결을 따라 아름답게 휘날린다(다섯 번째!). 아담한 코와 두툼하면서 큰 입도 나름 날카로운 관찰력을 동원해 그려 넣는다. 그런데 우리의 앤, 이가 참 크구나. 큼지막한 이가 고르지 않아 더 정겹게 느껴진다.
곱게 땋은 머리와 목, 옷, 손을 그리고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앤의 얼굴을 너무 길게 그린 것 같고, 또 아무래도 코와 입이 너무 아래로 내려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제부터 30분가량을 얼굴 균형을 잡는 데 다 쓰게 될 것이다. 코와 입 위치를 바꾸기 위해 세 번이나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그렸다. 입은 다섯 번 정도 다시 그렸다. 너무 큰 것 같아서 지우고, 너무 작은 것 같아서 지웠다. 수정을 거듭한 끝에 20분 그림 그리기가 1시간으로 늘어났다.
여전히 좌우 균형이 잘 맞지 않지만 오늘은 여기서 그만 그리기로 했다. 내가 그린 앤은 위가 아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면에서, 원본의 앤보다 다섯 살쯤 더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면에서, 원본의 앤보다 살짝 살이 더 붙고 조금 더 무표정해 보인다는 면에서, 원본의 앤과 많이 다르다. 그래도 난 원본의 이미지를 덮고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나름 만족했다. 이 정도면 됐다는 느낌이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됐다는 느낌. 이 느낌에 의지해 계속 그리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