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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너블 티처조 Mar 09. 2019

011 영어가 좋아서

영어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영어를 잘하면 기회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였다. 기회라는 말처럼 막연한 말이 어디 있나 싶다가도, 막연한 기대나 막연한 생각만큼 인간을 유혹하는 감정이 있을까 싶다. 그렇게 어렴풋이 영어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면 영어 라디오를 틀었고, 쥐고 있던 영어 책을 머리맡에 두며 눈을 감았다. 도대체 하루에 얼마나 영어에 시간을 투자하냐는 질문에 매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접하지 않는 시간 외에는 전부 영어를 접했으니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유학을 가지 못한 나는, 눈을 떴을 때 첫마디가 영어로 듣고 말하는 환경을 질투했다. 영화에서 흔한 장면인 “Wake up. Or you’re going to be late for school”이란 말 한마디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때부터 혼자 결심했다. 이제부터 일어나자마자 영어로 말하자. 최소한 첫마디는 영어로 뱉자. 근사한 영어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을 침대 근처에 붙였다. 생수통에도 붙였다. 보일러 스위치에도 붙였다. 화장실 거울에도 붙였다. 이럴 수가, 옷장에도 붙였다. 쓰레기통에도 붙였다. 신발장에도 붙였다. 현관문 뒷면에도 붙였다. 5평 원룸은 마침내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변했다.





눈은 해결했으니 이제 귀를 영어에 맞출 차례다. 내 영어 듣기의 8할은 EBS 어학 라디오와 팟캐스트 프로그램이다. 언제 어디서나 무료로 영어를 들을 수 있다. 나는 멀미가 심한 편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책을 읽지 못한다. 항상 이어폰을 귀에 꼽고 타는데, 그때마다 내 귀에는 영어가 흐른다. 날씨와 기분에 따라 종류는 바뀌지만 언어가 바뀌진 않는다. 또한 귀에서 들리는 소리를 입으로 따라 하는 습관이 있어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혼자만의 무대에서 처음 보는 시민 관객을 앞에 두고 영어 립싱크를 하는 셈이다. 힐끔 쳐다보는 관객에게는 가만히 웃으며 먼저 시선을 피한다. 내가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나를 봐도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10년 넘게 영어 삼매경에 빠져 있다. 영어로 숨을 쉬고, 영어와 걷고, 영어 옆에서 잠드는 상상을 해본다. 변태 같은 상상이지만 영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영어로 인해 나는 다른 자아를 얻었다. 모국어로 감각했던 사람, 사물, 상황을 다르게 느끼기 시작했다. 핵심은 다름이다. 한국어와 영어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많은 언어다. 영어를 처음 접할 때는 우리말과 비슷한 점에 끌렸다. 한국어에도 이런 표현이 있는데, 영어에도 이런 표현이 있구나, 하며 공부에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영어를 접하면 접할수록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에 놀란다. 차이에 매혹된다. 내가 지금 영어를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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