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 영어 표현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반복을 해야 한다. 비단 영어 표현뿐이겠는가. 모든 공부와 학습은 이해한 내용을 되풀이하고 확인하는 과정에 다름없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막상 마음을 굳게 먹고 영어 학습을 시작하면 배운 내용을 통으로 암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정리하고, 녹음하고, 메모해서, 마침내 암기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무의식 중에 ‘반복’에서 ‘암기’로 넘어가는 당위에 사로잡힌다. 암기와 반복은 동의어일까?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암기에는 ‘반드시 까먹지 말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같이 따라온다. 시험지를 받기 직전 입으로 여러 번 중얼거리는 순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백지에 암기한 내용을 빽빽이 적는 장면, 분명히 외웠던 내용인데 시험지를 받으니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는 상황이 딸려온다. 암기는 긴장이고, 불안이고, 스트레스다. 결점이 없음이 결점을 만든다. 우리는 공교육에서 평균 1년에 4차례 이상 이런 종류의 암기를 겪게 된다. 누군가가 나를 테스트하는 상황에서 뻔뻔하고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어를 접하면서 이런 불안을 매 순간 경험한다면 누구 건 영어와 멀어지지 않을까.
반복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덜 하다. 암기와 반복의 종착점은 같다. 배운 내용을 머릿속 장기기억 장치에 저장해서 필요할 때마다 제 마음대로 뽑아 쓰는 곳. 하지만 암기와 반복은 도착지까지 가는 경로가 다르다. 반복은 그 과정에서 순전히 ‘반복’에 의미를 두게 되지, 혹여 망각할까 봐 초조해하지 않는다. 반복에는 평가가 없고 감시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복 횟수를 기록할 조그만 종이면 충분하다. 반복하지 않고 암기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암기하지 않아도 반복할 수 있다. 암기하건, 반복하건 결국 서로 같은 종착역에서 만난다.
같은 내용을 반복하면 지루하지 않을까 봐 지레 겁먹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살짝 다른 각도로 ‘반복’을 정의하면 의외로 쉽게 힌트를 얻을 수 있다. “10번의 반복은 10번의 다른 경험이다.” (이 문장은 암기 금지 문장이다.) 1회부터 3회까지 반복해서는 매번 다른 경험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5회, 6회가 넘어가면, 점점 눈에 익숙해지고, 입에서 편해지고, 다음 내용이 뇌리에 저절로 예상되는 짜릿함을 체험할 수 있다. 내용은 그대로지만 뇌가 해석하는 정도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달라진다. 반복한 영어 표현과 내가 끈끈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반복은 억지로 욱여넣는 암기와 다르다. 반복은 10번의 따분한 시간이 아니다. 반복은 10번의 신선한 경험으로 기억하고 싶은 영어 표현과 찬찬히, 서서히, 살살 친해지는 ‘지적 자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