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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Nov 14. 2022

무력할 땐 니체

오두막에 불을 지를 수 있을까?

최근 성장이 정체된 느낌이 들어 약간(?)의 방황을 겪는 시기다. 새로운 것을 배워도 자극이 적다. 나름 활발히 하던 네트워킹 역시 멈춘 지 오래다. 업무에서도 새로운 시도보다는 유효했던 경험에 기계적으로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회사 팀원들에게 이야기하면 부담이 될까 나와 비슷한 커리어 패스를 거친 업계 동료들에게 정체감을 털어놓기도 하고, 선배들에게 조언을 듣기도 했다. 공통으로 돌아온 답변은 '속도를 멈추고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였다. 나는 주말에 잡혀있던 약속과 외부활동을 모두 취소했다. 그리고 사각거리는 이불속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토요일 오전을 모래알처럼 흘려보냈다. 이불 틈 사이로 서재 쪽을 바라보니 사놓고 읽지 않은 니체 책이 잔뜩 꼽혀있다. 특별히 좋아하는 철학자도 아닌데 저만큼이나 사들인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철학자도 사실 브랜드가 아닐까?


안 다듬은 지 한참은 돼 보이는 수염과 신경질적으로 넓은 이마,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빙하 같은 눈빛. 나는 홀린 듯 이틀을 니체에 파묻혀 지냈다. 그런데 웬걸? 몇 권의 니체 책을 내려놓고 나니 '망치를 든 철학자'나 '신은 죽었다'처럼 미디어에서 찍어낸 단호박 니체 이미지와 내가 읽은 니체가 상당히 달랐다!


권태로울 때 보니까 쥐약임


'신은 죽었다'는 말은 사실..

내가 가장 오해했던 니체의 말은 '신은 죽었다'였다. 여기서 '신'은 기독교적 상징이 맞지만 사실 층위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다. 기독교와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참된 세계인 이데아에 닿기 위해 '현실 세계'를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데아에는 흠결 없는 ‘의자’가 있고 완벽한 ‘사랑’도 존재한다. 이데아는 영원불멸하고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인데 현실 세계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불안한 세계다. 기독교 세계관 역시 플라톤 철학의 영향권에 있어 현실 세계에 대한 폄하의 뉘앙스가 존재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이란 서양 철학과 기독교를 관통하는 참된 세계이자, 신의 세계이자, 확립된 개념의 세계인 "이데아의 죽음"이었다.

'이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이데아 같은 세계가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라고 믿었던 믿음 체계가 무너진 순간, 우리에게는 과분한 자유가 주어진다. 무한한 선택의 자유에 풍덩 빠진 인간은 그 속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지 못하면 그대로 권태에 빠지고 만다. 니체 이후의 세계는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이데아의 등식이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일을 그르쳐도 옛 아테네 사람들처럼 파르테논에 모여 신탓을 할 수 없게 됐다. 니체의 숲에서 주말 동안 서성이며 그동안 내가 쌓아 올린 과거의 견고한 믿음 체계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았다. 한 걸음 더 다가가 본 내 믿음 체계는 낡고, 부서지고, 벗겨진 데가 많아 수리가 시급한 상태였다!



익숙함에 칼날을

니체에 따르면 진리란 한 사람의 과거 경험이 축조한 믿음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신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 빨간색 스포츠카, 높은 학력과 연봉 역시 현대적 믿음 체계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것들도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에 대해 최소한의 질문을 던져 보지 않는 것에 있다. 내 믿음 체계의 가장 중심부에는 '커리어의 성공'이 있었다. 그런데 니체를 읽다 문 듯 '내가 생각하는 커리어의 성공'에 대해 스스로 물어본 지가 굉장히 오래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 그러게 나한테 커리어의 성공은 도대체 뭐지?


니체는 진리(커리어의 성공)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의심해 보라고 권한다. 우선 질문 형식을 바꿔 보기로 했다. 제품 개발 방법론 중 아이데이션을 위한 HMW(How Might We?)라는 질문 기법이 있다. 고객 중심적인 질문법인데 ‘We’를 'I'로 바꾸었다. 그러자 거대하고 추상적인 질문이 곧바로 정교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커리어에서 성공은 무엇일까? > 어떻게 하면 내가 커리어에서 성공했다고 느낄 수 있을까? (HMI)

질문의 주체를 나로 바꾼 것뿐인데 답변의 태도 역시 바뀌게 되었다. 왼쪽 질문에서는 쉽게 떨어지지 않던 입술이, 우측 질문에서는 비교적 간단하게 답이 나왔다. 바로 "영향력의 증대"였다.

- 행복은 무엇일까? >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 사랑은 무엇일까? >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 풍요란 무엇일까? > 어떻게 하면 내가 풍요롭다고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란 앞서 나간 누군가의 생각이나 사회적으로 미리 구축된 관습일 확률이 높다. 니체는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왜" 추종하는지가 빠지면 결국 삶의 목표가 흐릿해지고 니힐리즘(허무주의)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대체로 흐릿하고 두루뭉술한 목표에는 왜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한 선배 디자이너는 커리어의 성공을 항상 물질로 빗대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선배는 유능했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바라던 물질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곧바로 공허가 밀려왔다고 했다. 선배에게 공허는 다른 물질로는 잘 메워지지 않았고 결국 공허의 자리는 권태가 차지하게 되었다. 유능한 능력도 정교한 목표를 만나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많이 깨달은 것 같다.


잠시 바람이 멈춘 지대에 서있다고 생각하자.

 

다행히 니체에게 권태란 부정적 의미가 아닌 다시 가슴 뛰는 목표를 재설정할 수 있는 바람이 불지 않는 무풍지대에 가깝다. 무언가 숙성되기 위해서는 권태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온라인의 어떤 분께서 비슷한 맥락으로 조언을 해주셨는데 마음을 다잡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진심으로 감사한 생각이 든다.


높은 수준의 목표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쉽게 개념이 잡히지도 않고 남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심지어 본인에게도 투명한 그림이 나타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야의 놀라운 성취를 이룬다는 목표는 사후적인 거지 사전적으로 추구할 때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
암튼 제게는 추구하는 동안은 지루하고 끝없고 어슴푸레한 게 당연하다는 의식을 갖는 거야말로 보통의 목표를 넘어서 소수가 도달하는 특별한 목표에 도달하는 요령이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내가 권태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다시 커리어에서 혹은 삶에서 가슴 뛰는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 무풍지대에 잠시 문다고 생각하자.



오두막을 불태우다

니체는 자신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오두막은 무엇을 의미할까?

'니체는 왜 자기 자신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라고 말했을까? 여기에서 니체가 말한 '오두막'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오두막은 내가 지금까지 의심 없이 믿어 왔던 가치 체계를 의미할 것이다.' <마흔에 읽는 니체>

오두막 내부에는 경험을 통해 획득한 가치 체계들이 가득할 것이다. 내 오두막을 들여다보니 주로 과거에 이룬 크고 작은 성취들이나 타인의 인정들로 가득했다. 오두막을 떠올리면 심리적인 안정감이 든다. 최근 코칭이나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컴포트 존(Comfort zone)과도 맥락이 닿아있다. 그런데 니체는 삶에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두막에 과감히 불을 지르라고 조언한다.


오두막을 불태우다


그리고 컴포트 존에서 벗어나 스스로 어렵다고 느끼는 상황에 자신을 과감히 몰아넣으라고 말한다. 컴포트 존을 벗어난 세상은 기존 가치체계나 익숙한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 불편함이 가득한 세상이다. 역동적이고 계속 변화하며 실체가 고정되지 않는 이곳이 바로 진정한 현실 세계라고 니체는 긍정한다. 현실 세계의 긍정은 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개념으로 사고하지 않고 불온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안온한 오두막을 태우지 못하던(이데아를 긍정하던) 나는 니체의 안경으로 보기에 현실 세계에서 발을 숨긴 유약한 인간처럼 비칠지 모르겠다.

'삶은 오류로 가득 차 있고, 오류에 맞서 싸울 때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마흔에 읽는 니체>

분명 스스로 오두막을 불태우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어쩌면


모두가 다 오두막을 불태울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오두막을 불태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계속해서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다.



삶의 순간에 조금 더 귀 기울이기

내 작은 오두막을 불태우고 가장 먼저 해볼 수 있는 실천은 무엇일까? 바로 기존에 믿던 가치 체계 전반을 의심해보는 것이다. 기존 가치 체계가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익숙함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체계를 구축할 당시의 나는 분명히 큰 노력을 했고 성취도 이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익숙한 방법에 대해 신뢰가 깊다. 그런데 여기에 현실이라는 변수가 개입한다. 현실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빠르게 흐른다. 대체로 개인을 지탱하는 믿음이나 가치 체계는 외부의 큰 충격이나 개입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삶의 순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마흔에 읽는 니체>

이번 골방 철학 위크에서 좋아하게 된 니체의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조형력(plastische Kraft)'이다. 조형력은 개인의 치유 능력과 비슷하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만약 상처를 입었는데 조형력이 없으면 개인은 레고 블록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조형력이 강한 사람은 현실에 적응해 상처를 치유하고 더 나은 방식으로 새살을 돋게 하는 능력이 있다. 내 생각에 조형력을 멘탈 강화나 단단한 내면에 대한 메타포로만 바라보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상처의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편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아물며 형성된 커다란 굳은살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순간에 귀 기울인다는 말은 매일 만나는 타인의 굳은살에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니체의 말처럼 나답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창의적인 인정과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조형력은 여기에 대한 좋은 기준점으로 작용한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방식으로 상처를 기우며 여기까지 달려왔을 것이다. 어렵겠지만 보이지 않는 타인의 상처를 상상하는 힘이 길러지면 조금 더 내 삶이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까지 버티느라 수고했어요.


이틀 동안 니체의 숲에서 방황하다 겨우 나왔다. 몸에 아직 니체의 잎이 묻어 있는 것 같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지만 어쩐지 마음은 조금 가볍다. 내일은 가까운 동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 봐야겠다.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 <니체의 말>



'무력할 땐 니체' (끝)


<참고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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