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디 Nov 21. 2022

소외 없는 디자인을 꿈꾸며

패트리샤 무어에서 나이키까지

20대에 80대 노인으로 변장해 3년을 산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패트리샤 무어(Patricia Moore)라는 미국의 산업 디자이너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걸까요? 그녀는 자신이 근무한 디자인 회사에서 냉장고 손잡이를 디자인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문득 힘이 약한 노인들도 쉽게 열 수 있게끔 디자인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자 돌아오는 답변은 냉담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디자인하지 않아”


패트리샤 무어는 충격에 빠집니다. 패트리샤가 재직한 회사는 레이몬드 로위 같은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노인들은 소비자가 아니었습니다. 디자인의 선한 영향력을 믿고 있던 패트리샤 무어는 고민 끝에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테스트하기 위한 급진적인 실험을 시작합니다.


철제 보조기를 한 패트리샤 무어 (출처: 아트인사이트)


무어는 철제 보조기로 다리를 뻣뻣하게 만들고 솜으로 귀를 틀어막습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아 사실적인 주름을 만듭니다. 흰머리 가발을 쓰고 뿌연 안경으로 일부러 시야를 흐리게 만듭니다. 그렇게 패트리샤는 3년을 노인의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것들이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분이면 도착하던 거리가 노인이 되자 1시간이나 걸리는 것이나, 신호등 녹색 불이 그렇게 빨리 빨간색으로 넘어가는지 등을 말이죠. 3년을 노인으로 변한 패트리샤는 이후 바닥이 낮고 출입구에 계단이 없는 ‘저상버스’와 물이 다 끓으면 소리가 나는 주전자 같은 포용적인 디자인을 합니다. 이런 디자인들은 노인의 어려움에서 출발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입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과 약자들을 배제하지 않는 이런 디자인 유형을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혹은 인클루시브 디자인(Inclusive Design)이라고 부릅니다. 유사한 개념이지만 유니버설 디자인은 조금 더 실물이 있는 제품 디자인이나 건축 디자인 등에 가깝다면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과 서비스 영역까지 아우르는 조금 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 사례들

생각해보면 디자인의 본질에는 ‘배려’라는 키워드가 함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아이콘이나 기호들,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알 수 있는 간판 디자인, 키를 고려해 높이가 다른 지하철 손잡이들, 어떻게 앉아야 할지를 디자인으로 알려주는 다양한 형태의 의자들.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디자인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도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인클루시브 디자인이라는 개념까지 필요한 것일까요? 패트리샤 무어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디자인은 “정상”이라는 기준에 의해 계획되고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의 주제인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어쩌면 디자인이 자신의 본질인 배려성을 다시 찾아가는 긴 여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점점 일상에서도 약자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려는 디자인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기다란 문고리가 있습니다. 동그란 문고리는 손이 불편한 장애인들이 사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그란 것을 꽉 쥐고 돌릴 만큼의 악력이 있어야 하며 손목의 회전에도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장애가 없는 사람 역시 양손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거나 손바닥이 미끄러우면 사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기다란 문고리는 동그란 문고리에 비해 힘이 덜 필요하고 몸으로 밀어서도 열 수가 있어 더 많은 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는 디자인입니다.

    계단이나 횡단보도의 턱 역시 은근히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디자인입니다. 휠체어의 진입을 고려해 지어지는 경사로나 단이 없는 횡단보도, 계단이 없고 지상으로 낮게 설계된 저상버스 등은 모두 포용을 위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장애인뿐 아니라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나 어린이, 부상을 입은 사람, 많은 물건을 옮겨야 하는 택배 노공자 등을 배제하지 않기 위한 노력입니다.

    어린이 역시 사회에서 보호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학교 근처에 있는 고원식 횡단보도는 배려적인 요소가 들어간 디자인입니다. 고원식 횡단보도는 과속방지턱이라고도 불리며 기본적으로 운전자의 서행을 요구하는 디자인입니다. 이를 통해 자연스레 운전자들이 감속하고 아이들의 안전이 확보가 되는 구조입니다.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해가는 인클루시브 디자인

앞서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가치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사회적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넘어서려는 시도 등이 인클루시브 디자인에 모두 포함됩니다. 대표적으로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특히 서구식 마른 몸매는 고정되고 획일화된 미적 가치를 전합니다. 다행히 최근에는 다양한 브랜드들에서 [인클루시브 뷰티]라는 개념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모델의 다양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스포츠 웨어 브랜드 ‘Chromat’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무척 다른 모델들이 보입니다. 비만으로 보이는 여성은 물론 성 소수자, 트랜스 젠더 등이 당당하고 멋지게 모델로 서있습니다. 이 브랜드의 수영복 사이즈는 x-small부터 시작해 4x까지 존재합니다. 브랜드는 일반적이지 않은 모델들과 철학이 담긴 상품을 통해 고정된 아름다움이란 결국 상상의 질서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Chromat 사이트에 있는 모델들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제 눈에는 깡마른 모델보다 훨씬 힙하고 멋지게 보입니다.


다양성 모델을 기용하는 브랜드 (출처: Chromat)


패션 쪽에서도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활발히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평소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에게 옷은 더 이상 멋을 부리는 도구가 아닙니다.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들은 바지 하나를 입는데도 10분이 넘게 소요됩니다. 특히 바지에 큐빅이나 스터드처럼 너무 많은 장식적 요소가 있다면 휠체어에 앉을 때 엉덩이가 배겨 입을 수 조차 없겠죠.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애인들은 일상복을 수선해서 입거나 아웃도어 같은 옷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죠. 최근에는 벨크로를 활용해 휠체어에 앉아서도 쉽게 바지를 벗을 수 있거나,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일하는 장애인을 위해 바지의 앞면은 짧고 뒷면을 길게 해 말려 올라가지 않게 디자인된 의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조금씩 의식이 개선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역시 이러한 인클루시브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답니다. 나이키의 디자이너 토비 햇필드는 미국 플로리다에 사는 뇌성마비 장애를 앓고 있는 매튜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편지에서 매튜는 살면서 많은 것을 극복했지만,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발 끈 묶기라고 말합니다. 디자이너는 매튜의 편지를 통해 끈 묶기에 어려움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위한 ‘고 플라이어즈’라는 제품을 출시합니다. 고 플라이어즈에는 매튜의 바람대로 신발끈이 존재하지 않으며, 손을 사용하지 않고도 신발을 쉽게 신고 벗을 수 있습니다. 착용 전에는 ‘ㅅ’ 자 형태로 꺾여 있는데 여기에 앞발을 먼저 넣고 뒤꿈치를 밟으면 수평이 만들어지는 형태의 디자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이키의 디자인으로 인해 매튜가 조금 더 세상에 배려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나이키 고 플라이어즈 (출처: 네이버 포스트)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다양한 디자인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글 서두에 등장한 패트리샤 무어는 한 인터뷰에서 노인 분장을 한 결정적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요리를 좋아하던 할머니가 냉장고 문을 여는 게 힘들어지자 요리하는 행복을 잃으셨는데 꼭 되찾아 드리고 싶었어요”


배려를 위한 디자인은 번뜩이는 크리에이티브보다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사회적 약자가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이 내 주변에는 없는지 살피는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요?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며'(끝)


<참고 자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