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드는 사람들
디자이너 직책으로 일할 때는 매일매일 업무에 치여 내 모습을 제대로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 맞게 최선을 다했다. 현재는 프로덕트 오너로 팀을 매니징 하며 다양한 디자이너들과 시간을 보낸다. 다른 산업에 있는 디자이너들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러자 디자이너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디자이너에 관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과정에서 문득 오늘날 디자이너의 모습과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금은 주변인의 시선에서 말이다.
디자이너 시절, 내 역할에 대해 누군가 물어오면 항상 이렇게 답했다.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드는 사람"
주니어 시절에는 무게 잡는다고 선배들한테 혼도 많이 났다. 그래도 생각을 쉽게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디자이너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설계"의 측면이 무척 강하다. 이 경우 실제로 디자인을 하는 도안적 의미가 축소된다. 반대로 디자이너를 도안 그리는 사람으로 정의하면 설계의 측면이 너무 약해진다. 오늘날 디자이너는 이 두 가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통합할 수 있어야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만드는"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UX디자이너와 UI디자이너의 역할을 너무 극명하게 나누는 일이다. 만약 어떤 패스에서 유저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골이 CTA 버튼을 누르게 하는 것이라면 패스상 설계와 시각요소가 매우 유기적으로 조율되어야 한다. 그런데 UX와 UI가 나뉘면 어느 한쪽에서는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미루거나 추측할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에는 유기성이 떨어진다.
얼핏 프로덕트 디자이너들 모니터를 보면 페이지 하나하나를 열심히 디자인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맞는 말이지만 최종적으로 각 페이지들은 맥락에 맞게 이어져 어떠한 질서를 구축한다. 한 장 한 장을 예쁘게 디자인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다.
노출 콘크리트로 유명한 건축 디자이너 안도 다다오는 벽으로 시퀀스를 만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본 효고현에 있는 '물의 절'은 그러한 측면이 잘 녹아있다. 글을 따라 물의 절로 잠시 발걸음을 옮겨보자.
여름날 좁은 길을 따라 언덕을 한참 올라간다.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정상에 다다른 것 같다. 숨이 가빠온다. 정상에는 탁 트인 공간 대신 무척 긴 벽이 존재하는데 내 시선을 떡하니 가로막는다. 벽에 나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자 높은 벽이 양 옆으로 솟아 있다. 아까보다 길은 넓어지고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긴 벽을 돌자 공간이 개방돼 연꽃 연못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시선을 압도한다. 일반적인 절과 달리 물의 절은 지하에 법당이 있는데, 석양이 질 때 가면 실내 전체가 주홍빛으로 물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물의 절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은 디자이너가 구축해 놓은 시선의 차단과 확장, 빛과 색을 통해 종교를 완전히 다시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한다. 이는 건축 언어로 구성된 보이지 않는 질서가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경지다.
일상이 디지털로 넘어온 현재 작은 모바일 화면에서 이루어지는 경험들도 건축의 시퀀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앱을 켜면 나오는 첫 화면부터 가치가 결정되는 시점까지의 흐름은 안도 다다오의 시퀀스와 개념상으로 유사하다. 디지털 경험 시 유저가 서비스에서 확실한 가치를 느끼는 지점을 'Delight Experience'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것은 좁은 길과 개방감을 오가는 지연과 환희처럼 시퀀스의 텐션이 없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아래는 명상 수련 앱 중 가장 유명한 캄과 헤드스페이스의 첫 화면이다. 같은 명상 앱이지만 무척 다른 시작점(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캄은 화면의 뷰포트 절반을 정보성 영역이 아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연 영상을 재생한다(만약 당신이 대표라면 이러한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겠는가!). 사운드도 함께 재생되는데 이를 통해 앱에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사운드 메디테이션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이후 마음 챙김과 관련 있는 다양한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다. 캄은 화면과 화면을 넘어가는 과정에서 색과 이미지들이 무척 정서적으로 조율돼 있다. 캄의 리뷰를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앱을 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캄의 디자인 형식에는 그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매우 앞단에서 부터 적용되어 있는 셈이다.
반면 헤드스페이스는 일상에서 따라 할 수 있는 명상 튜토리얼들을 여정 형태로 매우 쉽게 제공한다. 첫 페이지는 하얀 배경에 귀엽고 단순한 일러스트 이미지가 전부다. 하지만 헤드스페이스 캐릭터를 따라 호흡을 5번 깊게 들이마시거나 3분 정도의 쉬운 명상 안내를 받다 보면 명상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며 일상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가치 역시 헤드스페이스의 디자인 형식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포드주의가 없었다면 자동차는 대중화되지 못했다. 다음 세 가지 가치가 중심에 있다.
1) 극단적인 분업에 기대 직무를 조각화 한다.
2) 노동자를 컨베이어 벨트에 종속시켜 높은 생산성을 보장한다.
3)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인한 노동자의 피로를 높은 임금으로 보상한다.
이러한 포드주의 방식은 성공적이었고,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다양한 분야(사무직)에서도 이를 응용한 방식으로 자연스레 분업화가 일어났다.
최근 디자이너들을 만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회사가 성장하고 전문인력들이 많아지자, 디자인 역시 다양한 전문 영역으로 분화해 예전에는 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쉽게 침범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디자인 시스템만 관리하는 디자이너가 생겼고, 인터뷰나 VoC 관리 같은 정성적인 측면만 다루는 디자이너도 있고, 인터페이스 속 라이팅만 다루는 디자이너도 있다. 회사에 직책이 세분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서비스가 고도화돼 전문성을 추구할 시점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분명 사업 측면에서는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오늘의 주제는 디자이너에 관한 것이니 논의를 약간만 열어보자.
최근 주제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고충을 털어놓은 디자이너가 있었다. 디자이너의 직책이 고도로 분업화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담아들어볼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공개한다(인용 허락받았습니다!).
예전에 회사에 디자이너가 몇 없을 때는 넓은 영역을 맡았고, 시작과 끝에 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자발적으로 채워 넣었고, 그런 일들에서 많은 보람을 느꼈어요. 전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죠. 현재는 회사가 커졌고 디자인 업무가 매우 분업화 됐어요. 사실 주어진 영역만 잘하면 돼서 회사 다니기는 더 쉬워졌어요. 하루에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사람들도 명확히 정해졌죠. 참고로 월급루팡은 아닙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전문성을 요구하니 예전보다 작업에 대해 방어적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조금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내밀한 부분들을 감추고 싶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거든요? 요즘 들어 이게 제가 원래 꿈꾸던 디자이너의 모습인지 많은 고민이 돼요.
완성도 높은 오픈소스의 범람과 디자인 시스템 같은 극도의 효율추구 같은 씬의 변화는 기술 발전과 연관 지으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반면 예전과 달리 디자인의 미학적 추구에 관한 논의가 씬에서 거의 멸종한 것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내 생각에 디자이너는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맞다. 다만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앞서 말한 보이지 않는 질서와 맥락과 관련 있으며, 맹목적인 장식과는 명확히 구별된다.
사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고독한 마라토너와 비슷하다. 미적인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개발처럼 인풋과 아웃풋이 명확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아름다움 추구가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행위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시간을 많이 투자한다고 해서 꼭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스타트업이나 서비스에서는 아름다움 보다는 사용성(사용하기 쉬움) 같이 효율성이 좋은 디자인 가치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되는 이유인 것 같다. 그런데 아름다움과 사용성은 어떤 것을 포기하고 취할 만큼 비교가 가능한 레벨일까?
아름다움 추구가 고독한 마라톤인 이유는 결국에는 조직에서 미적 수준이 가장 높은 그룹 혹은 개인이 견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 사람들은 디자이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미적인 부분은 과정과 수준에 대해 언어화가 유독 힘들다. 더불어 비 디자이너들도 지나가다 모니터에 한 마디씩 거들기가 쉽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미적 추구는 가치 절하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미적으로 수준이 높다는 것은 개인이나 그룹이 좋은 방향으로 오랜 시간 걸쳐 섬세히 가꿔야 닿을 수 있는 어려운 경지다.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훈련을 어렸을 때부터 꾸준하게 받고, 삶의 일부가 된 사람들을 말한다.
아름다움이나 디자인 추구가 프로덕트나 서비스에서는 어떠한 가치를 줄 수 있을까? 실제로 높은 매출을 올리는 회사들이 미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디자인이 만병 통치약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디자인 혹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쌓아 올렸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회사들이 애플, 배민, 캄같은 회사다. 이 서비스들은 시작과 함께 저마다의 디자인 가치를 추구했다. 이들과 같은 카테고리에 있는 2등 주자 머릿속에는 격차를 따라잡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비즈니스나 시스템적인 측면도 있지만 소비자들 머릿속에 각인된 고유한 디자인 가치 때문이다. 이 가치는 대기업이 등장해 돈을 갑자기 많이 부어도 구축할
수 없다. 오랜 시간 자기다움을 지키며 섬세하게 길을 걸어가야만 얻을 수 있는 궁극의 가치이며, 중심에는 디자이너가 있다.
이러한 가치가 획득될 경우 디지털 경험 측면에서도 엄청난 강점이 생긴다.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미적 사용성 효과'(Aesthetic–usability effect)다. 사용자는 미적으로 뛰어난 디자인이 사용하기 편하고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제품이 사용하기 편리한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대표적으로 애플 제품을 떠올릴 수 있다. 애플 제품은 단지 애플인 이유만으로 매년 새로운 제품이 나올 시 엄청난 미적 사용성 효과의 낙수를 얻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록을 더듬어보면 화가나 조각가를 넘어 건축, 해부학, 지리학, 음악, 문학, 역사학, 지리학, 심지어 요리 같은 분야까지 다방면에서 활약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빈치 서적을 살펴보면 그가 천재적인 이유는 의외로 굉장히 이질적인 분야들 간 융합의 지점을 잘 찾는 능력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매시업 개념이다. 즉, 처음부터 저렇게 많은 분야를 섭렵하고 행보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융합을 해나가다 보니 저렇게 까지 다양해졌다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다빈치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디자이너'라고 불린다.
애드 아스트라 학교의 별명은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사립학교'다. 이 학교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제도권 학교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직접 세웠다. 대부분 스페이스 X 임직원 자녀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 설립 목적에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애드 아스트라를 졸업한 아이들이 화성 이주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육성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공개된 커리큘럼을 보면 정식 과제가 없고 성적을 매기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대부분 선택한 주제에 맞게 팀으로 협력하며 시간을 보낸다. 수업의 중심에는 수학, 화학, 공학, 윤리가 있고 음악과 언어 교육은 받지 않는다. 다음은 애드 아스트라에서 공개한 '아스트라 플레이'라는 게임이자 수업의 일부다.
여러분 지금부터 상상을 해봅시다. 먼저 작은 마을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마을의 주민 대부분은 한 공장에서 일하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 공장은 호수를 오염시키고 있어요. 공장을 폐쇄해야 할까요, 아니면 사람들의 일자리를 지켜야 할까요?
아이들은 매일 같이 답이 없는 '윤리적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한 가지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은 답이 아닌 상황과 기술을 고려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을 찾는 것으로 수렴한다. 아스트라 플레이를 통해 우리는 '답‘이 가지는 맹목성과 추상성을 새삼스레 마주할 수 있다. 만약 애드 아스트라의 ‘아이’를 ‘디자이너’로 바꿔보면 어떨까?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분업화와 전문화를 개인이 막을 수는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총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의 중심에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존중에 앞서 이미 와있는 답이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에 있다. 그 문제들을 꼭 디자이너들이 직접 해결할 필요는 없지만, 디자인적 사고는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디자이너의 역할은 어때야 할까? (끝)'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