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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May 23. 2020

당신이 읽는 동안 일어나는 일들

헤라르트 윙어르의 '당신이 읽는 동안'을 읽고

당신이 읽는 동안'은 네덜란드 도로표지판을 위해 고안된 <ANWB 폰트>, USA 투데이, 슈투트가르터 차이퉁같은 유럽 신문에 사용되는 <걸리버>, 스코틀랜드와 브라질 신문에 사용하는 <코란토>등의 글꼴을 만든 디자이너 '헤라르트 윙어르'라는 쓴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읽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흥미로운 현상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읽는다는 마법 같은 행위

우리는 매일 같이 활자와 마주칩니다. 출근 중 전광판을 보고, 핸드폰의 메일을 읽고, 또 누군가는 종이책을 읽습니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숨 쉬는 것 같이 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읽는 행위는 '글자'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글자들은 세리프(글자 획 끝에 달린 돌기)의 유무나, 자간(글자 간 간격), 행간(줄과 줄 사이 간격), 장평(글자의 가로폭)등 수많은 시각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읽는 순간, 놀랍게도 글자들이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징도 함께요. 사라진 글자들은 머릿속에서 생각과 이미지와 목소리의 형태로 바뀝니다. 헤라르트 윙어르는 이 순간을 '마법이 성공하는 순간'이라 칭합니다. 저자의 말대로 글꼴의 인지를 멈추지 않으며 무언가를 읽어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지금 테스트해보셔도 좋습니다.


 "창문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고 그림까지 있다면 그 너머로 풍경을 보기는 힘들다. 즉, 타이포그래피는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요소로 저자와 독자 사이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그냥 배경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글꼴은 당연히 가능한 평범해야 하고, 전체적인 레이아웃도 마찬가지이다."


윗 인용글은 헤라르트 윙어르의 타이포그래피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만약 타이포그래피 스스로 무언가를 웅변한다면 마법의 순간은 깨지게 됩니다. 그 순간 글자를 읽는 것(read)이 아니라 보게(look)되겠죠. 운전 중 시끄러운 타이포그래피로 안내된 전광판을 만난다면 마법이 깨져 위험할 수도 있겠군요.


저자가 디자인한 네덜란드 교통표지판에 쓰인 글꼴



읽는 도중 눈에서 일어나는 일

무언가를 읽을 때 우리 눈은 텍스트를 따라가며 '단속성 운동'이라는 점프를 합니다. 즉, 우리는 글을 읽을 때 글자 하나하나를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덩어리째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운동 중 문맥을 통해 예측 가능한 단어들은 우리 뇌가 그냥 통과시킵니다. 뇌는 역시나 경제성을 최고로 치는 기관입니다. 이미 읽은 것, 또는 알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연역해 의미를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단속성 운동은 읽기 행위에 숙련된 사람일수록, 혹은 맥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내면으로 침잠하여 읽기에 모든 것을 던지는 순간 의식적인 행위는 무의식 상태로 전환된다. 무언가를 읽기 위해 쳐다보기 시작하고, 그 내용에 더 깊이 빠져드는 순간 당신은 자동조종 장치에 앉게 된다. 글이 당신을 끌어들인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더 나은 읽기를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

사람들은 글자의 세리프나 미세한 굵기 변화들이 읽기에 있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헤라르트 윙어르는 오랜 연구 끝에 글자의 세부 요소들이 읽기에 일익을 담당한다는 확고한 결론을 얻습니다.

    예컨대 대부분의 글꼴에서 O처럼 아래위가 둥근 글자들은 Z나 E처럼 평평한 글자보다 아래위로 조금씩 더 튀어나와야 합니다. 만약 O와 E의 높이가 정확하게 똑같으면 O가 더 낮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G나 b의 곡선에서 가장 두꺼운 부분은 직선보다 더 두꺼워야 눈에 똑같아 보입니다. H는 얼핏 보면 굵기가 같아 보이지만 사실 가로획이 수직선보다 약간 얇습니다. 가로와 세로를 똑같이 하면 가로획이 더 두꺼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글꼴을 대하는 디자이너들은 인간 망막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시각적 보정으로 글자를 재탄생시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자를 제대로 보이게 하려면 우리 눈을 속여야 하는 것이죠. 어쩌면 ‘읽기'라는 마법의 순간들은 디자이너들의 숨은 노력 없이는 힘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동그라미 높이를 사각형보다 약간 높게 해야(우측) 수평이 맞아 보인다.



호기심과 친숙함에 대한 욕망

사람들은 티셔츠나 초청장, 포스터의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에는 관대한 편입니다. 그러나 텍스트가 길어지고 읽기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사람들은 이내 글꼴이 통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랄 것입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글자에 '평화가 깃드는 순간'입니다. 변화에 대한 호기심과 친숙함에 대한 인간의 양가감정은 타이포그래피가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책 내용 중에는 한 신문사가 폰트를 기존보다 아주 약간 다른 걸로 발행했더니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던 사건이 수록되어있습니다. 익숙한 폰트가 아니라 가독성에 영향을 준 것이겠죠. 신문사는 얼마 안 가 폰트를 복구했고 항의는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읽는 행위에 더 보수적입니다. 반대로 시끄러운 페스티벌에 입고 갈 티셔츠 문구에 평화가 깃들어있다면 왠지 손이 잘 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신이 읽는 동안 일어나는 일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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