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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Aug 18. 2020

헬베티카의 표정

중립주의와 몰개성 사이에서

해당 글은 1년 전 작성한 '헬베티카의 표정'을 다듬어 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내가 헬베티카 논쟁에 관심 갖기 시작한 건 동명의 영화 때문이었다. 게리 허스트윗 감독은 '헬베티카'라는 서체 하나를 두고 시각물을 대하는 인간 심리부터 전 지구적 자본문제까지 연결시킨다. 2007년도에 나온 영화지만 여전히 헬베티카를 둘러싼 논쟁은 현재형이다.


영화 '헬베티카'의 포스터


헬베티카와 스위스 모던

영화는 헬베티카가 서체로서 얼마나 위대한지에 초점 맞추지 않는다. 영화의 핵심은 서체를 둘러싼 첨예한 의견 대립이다. 중심에는 헬베티카의 중립적인 성격이 있다.

    헬베티카는 1957년 서체 디자이너 막스 미딩거와 에두아르트 호프만에 의해 초안이 제작되었다. 이후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1960년 독일 스템펠사를 통해 '헬베티카'라는 이름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때마침 세상은 표현적인 디자인 스타일에 피로감이 일던 시기였다.


[그림 1] 레트로풍 코카콜라 포스터


'코카콜라 빈티지 포스터'를 구글에 검색해보면 [그림 1]과 같은 스타일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의 적극적 활용, 다양한 서체와 크기, 탈 그리드 시스템 등의 특징이 있다. 현재는 레트로 스타일로 소비되지만, 60년대만 하더라도 뚜렷한 시각적 대안이 없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레트로풍 광고를 볼 때면 모든 시각 요소가 자기를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기분이 든다. 헬베티카는 이러한 시각적 소음 속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강력한 대안이 됐다.

     헬베티카가 타 서체와 다른 점은 탄생과 함께, 서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같이 전파되었다는 점이다.(다양한 폰트 패밀리와 함께 등장한 유니버스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 방법은 이미지와 텍스트, 캡션 등 지면에 존재하는 모든 시각 요소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그리드 시스템'과 '중립적인 서체'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양식으로 디자인된 시각물을 보고 스위스를 떠올렸다. 특정 폰트와 디자인 방식이 국가 정체성으로 연결된 셈이다. 이를 '스위스 모던 타이포 그래피 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림 2] 스위스 모던 타이포 그래피 양식



헬베티카의 표정

헬베티카는 내용 전달에 있어 중립적이다. 서체에 *세리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 3]의 Sad는 두 가지 서체로 쓰였다. 좌측은 '헬베티카'고 우측은 '스넬 라운드 핸드'다. 헬베티카로 쓴 Sad에는 표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표정이 없는 서체는 특정 의미를 지향하지 않는다. 대신 헬베티카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들이 의미를 만들어갈 뿐이다. 우측 Sad는 우아하게 뻗은 세리프 때문인지 감정이 느껴진다. 즉, 이 서체는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헬베티카의 중립적 성격은 다국적 브랜드의 시각적 아이덴티티로 활용될 수 있는 커다란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세리프: 획의 끝에 달린 장식용 꼬리. 서체의 장식에 주로 쓰인다.


[그림 3] Sad를 헬베티카와 다른 폰트로 썼을 때의 차이.



헬베티카의 다국적성

무인양품, lufthansa, BMW, 노스페이스 같은 다국적 브랜드는 물론, 공문서나 국가 이미지까지 헬베티카는 현대인의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있다. 이는 헬베티카의 중립성 덕분이다. 하지만 이 같은 성격 탓에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기업이 이미지 세탁을 위해 헬베티카를 사용한 로고로 다시 세상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체가 만든 객관적 이미지는 시간이 갈수록 과거를 무디게 만든다. 이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현재도 많은 기업이 편향된 이미지를 벗고자 헬베티카를 선택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이 선호하는 헬베티카


영화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동맹군의 비행기 외관이 헬베티카로 디자인됐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는 마치 세계의 객관적 입장이 미국이고 베트남은 악이라는 메시지를 단호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헬베티카와 스위스 모던 타이포그래피 양식은 언제나 중립적이라기엔 시대 주류의 얼굴에 가까울 때가 많았다.




'헬베티카의 표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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