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나는 드라마에 한껏 빠져살았다. 취업에 대한 걱정,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고자 드라마에 한껏 빠져살았던 것 같다. 매번 그저그런 사랑이야기들에 지쳐갈때 쯤 한 친구가 정성스레 구운 CD 여러장을 내밀며 이거 한번 보라고 추천해주었다. 네 멋대로 해라. 장 뤽고다르가 만든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작과 같은 이름의 작품... 제목이 속된말로 참 쌈빡했다.
벌써 방영된지 18년이 훌쩍 넘은 드라마, 방영된지 참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 이 만큼 비주류 인생들의 찬란함을 아름답게 그린 드라마를 만나보지 못했다. 대중성을 필두로한 막장 드라마의 홍수속에 이만큼 인디스러운 드라마가 또 나올 수 있을지가 의문스럽다. 인디 드라마 답게 네 멋대로 해라는 유례없는 마니아들을 생산해냈다. 네멋30이라는 카페를 주축으로 이들은 드라마 팬덤문화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지금이야 글로벌 단위의 메가 팬덤 ARMY가 존재하지만, 수동적인 시청자가 집단을 만들어 콘텐츠를 생산하는 등의 능동적 팬덤은 네 멋대로해라가 시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 또한 잠깐이지만 이 커뮤니티에 속해서 같이 MT도 가고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이들이 생산해낸 드라마 관련 자체 콘텐츠들은 상당했다. 네멋 주인공을 대상으로 노래들을 작사 작곡해서 올린 팬이 있는가하면 조직적으로 팬 다이어리를 만들기도 하고 건물이나 야외공간을 빌려 드라마 전회 상영회, 편집본 상영회 등을 조직적으로 기획하기도 했다. 또한 MBC를 설득해 감독판 DVD를 만들도록 했다는 점은 놀랍다. 이렇게 나온 DVD가 우리나라 드라마 DVD로서는 처음이었다. 판매량도 엄청나 당시 극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엽기적인 그녀 다음으로 2위의 판매량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 드라마의 팬들의 영향력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유별났던 것이다. 이는 드라마가 인디적인이었다는데에서 기인한다. 인디 코드 자체가 대중성은 떨어지지만 일부 극렬 마니아들의 전폭적 지지라는 특성을 갖는다. 이하의 글은 지금으로부터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시점에 작성했던 글이지만 브런치에 기념으로 다시 한번 올려본다.
■ 드라마의 인디적 성격
인디 밴드들은 주류 문화를 거부한채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통해 사회적 주류들을 비웃는다. 오직 자신들의 목소리만이 중요할 뿐 대중적인 인기 따위는 관심에도 없다. 비주류의 목소리로 주류에 대해 통렬한 어퍼컷을 날림으로써 자신들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이에 매료된 비주류 수용자들은 그것에 광적으로 열광한다. 비주류... 이것이 인디 문화의 코드이다.
네 멋대로 해라 또한 이런 인디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소매치기 전과 2범의 고복수, 인디 밴드의 키보디스트인 전경, 대학생을 꿈꾸며 야구단 치어 리더를 하고 있는 송미래라는 비주류 캐릭터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하나같이 미래가 안정적이지 못한 하위 인생들이다. 드라마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반면에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류들은 하나같이 불쌍하다. 전경의 집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호텔 사장, 오빠는 중고차 회사 사장, 어머니는 그냥 여가 생활만 즐기며 산다. 겉으로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지만 잘 살펴보면 문제가 상당히 많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랑을 단 한순간도 받지 못하며 그런 어머니는 가정에 전혀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빠는 세상에 즐거움이라는 걸 모르고 돈만 보고 시집을 온 새 언니는 식모같은 나날을 보낸다. 가정에 웃음이 없고 밥상에서는 늘 침묵만이 감돈다. 다들 죽어 있는 것 같은 가정에 살아 숨쉬는 건 주류의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비주류의 세계로 뛰어들어간 전경뿐이다. 또 한동진 기자를 살펴보자. 이 사람은 아주 핸섬한 외모에 돈도 많고 직업 또한 번듯하다. 주류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주류적 속성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 전경의 주위를 늘 맴돌 수밖에 없다.
“전 한동진 기자님 같은 속물보다 복수씨 같은 전과자를 더 존경해요.”
전경의 대사 中
“세상의 주류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한 단어는 안정입니다. 안정은 질서입니다. 그에 대해 전 부당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불안한 영혼의 찬란함을 내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게 저의 마이너리티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숨쉬고 사는 세상이 재미난 세상입니다. 그게 저의 정치관입니다 .”
네 멋대로 해라를 집필한 인정옥 작가의 말이다. 작가의 의도에서 인디적 성향이 물씬 묻어난다.
이 드라마는 이러한 성향 때문에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다. 반주류적 인디 문화는 주류 대중문화에 길들여진 일반 시청자들이 수용하기는 버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인디 밴드의 음악이 그렇고 B급 독립영화가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새로운 것을 원하던 젊은이들은 열광한다. 매니아 문화는 반주류적 문화이다. 때문에 반주류적 텍스트 속에 매니아가 생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 장르적 관습의 탈피
이것 또한 인디적 속성 중에 하나일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서 할 말이 많기 때문에 따로 구분을 짓겠다. 그럼 네 멋대로 해라의 장르를 분류 해보자. 이드라마는 젊은 남녀가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우리나라 멜로 드라마의 전형적 소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남자 주인공의 시한부 판정이라는 신파적 소재까지 덧붙여 소재로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한국형 멜로 드라마이다. 하지만 네 멋대로 해라는 멜로 드라마의 장르적 관습을 철저히 비켜나간다. 플롯이며 등장인물이며 기존의 그것과는 엄연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기존의 멜로 드라마에서 보여지던 선남선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전경역의 이나영 정도면 선녀축에 낄 수 있겠지만 고복수역의 양동근이나 송미래역의 공효진은 절대 선남선녀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충분히 있을 법한 외모를 가졌다.
캐릭터간의 관계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특징지을 수 있는 요소이다. 자신의 돈을 소매치기해 친구를 죽게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경이, 자신의 애인을 뺐어간 경이와 오누이처럼 지내게 되는 미래, 자신을 고아원에 맡겼던 아버지를 지극히도 사랑하는 복수. 기존의 One-way 캐릭터로는 있을 수가 없는 관계이다.
이야기 구조면에서도 예측불허이다. 뻔한 스토리 구조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멜로 드라마의 특징 중 하나가 뚜렷한 선악 대비 구도이다. 꼭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인이 등장을 해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이런 것이 갈등의 주축을 이룬다. 네 멋대로 해라에도 비슷한 사람이 딱 한 명 등장한다. 복수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형사 박정달. 그는 복수 때문에 손가락을 잘리고 늘 장갑을 끼고 다닌다. 이에 대한 증오 때문에 복수를 어떻게든 못살게 굴려고 하지만 연출자는 그를 불쌍한 사람의 하나일 뿐 악인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네 멋대로 해라에서 악인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멜로 드라마라면 남발 되어야할 키스씬은 물론이고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떤 드라마에서 보던 커플들보다도 ‘주인공 둘은 죽도록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것이 느껴진다. 네 멋대로 해라는 장르의 특징인 친숙함, 관습적, 반복적인 것들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대중들에게는 다가가지 못하지만 신선한 것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한발 더 다가간 것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철저히 비주류를 지향한다. 이와 같은 마니아 지향적 드라마는 과거 MBC가 드라마 왕국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획일 것이다. CJ와 JTBC가 주도하는 스튜디오 시스템,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공룡 사업자의 등장은 지상파 드라마에 빙하기를 불러왔다.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며 콘텐츠의 규모는 과거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다양한 콘텐츠들이 경쟁하는 현 상황속에서 이러한 과감한 기획은 시도되기 어려울 수 있다. 주류간의 경쟁속에서 밀려나는 비주류 콘텐츠, 이러한 콘텐츠에 대한 목마름이 더욱 커지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