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뇌졸중+코로나 극복 일기
좋은 거 알아보기
할머니가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인터넷에는 코로나의 위험성과 치사율이 무섭게 적혀있고, 나오는 범람하는 인터넷 뉴스들은 모두 믿고 싶지 않았다.
모두 거짓말 같아, 인터넷의 수많은 코로나 관련 위험들이 우리 집은 피해 가길 바랬다.
2022년 3월 22일, 화요일
할머니가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나는 독립해 살아서 괜찮았지만, 할머니와 같이 거주하는 세 식구가 모두 확진되었다.
밥 차리는 고생이라도 덜어주고자, 끼니때마다 식사를 주문해 배달시키기로 했다.
주변 확진되었던 동료들, 친구들, 지인들께 뭐가 먹고 싶었는지, 매운 거 안 매운 거 어떤 게 좋은지 물어보았다.
매운 건 상관없고, 맵고 짠 비빔국수 종류가 맛이 조금 느껴져서 제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OK. 정보 줍줍, 메모 메모
2022.03.23 수요일
할머니는 식사도 잘하시고, 아직은 많이 안 아프신 것 같다.
할머니는 일반 사람들보다 백혈구 수치가 두배 이상이라 면역력이 높고, 감기 한번 걸리신 적이 없다.
주간보호센터 갔다 오셔서 코로나에 걸려서 오셨다.
할머니는 괜찮은데 엄마가 너무 아프다.
살이 찢어질 것같이 아프다고 한다.
저녁밥은 엄마가 뼈해장국이 좋겠다고 해서 해장국 세 그릇을 주문해 보냈다.
2022.03.24 목요일
이른 아침은 배달이 되는 곳이 없다.
그나마 김밥집이 배달이 되어서 해물순두부찌개와 김밥을 시켜드렸다.
할머니는 드시는 건 엄청 잘 드신다고 한다.
점심때는 치킨과 피자를 세트로 주문했다.
엄마는 할머니 드실 것만 시키라며 양이 너무 많다고 하시지만, 식구들 모두 뭐든 잘 먹어야 빨리 나을 것 같다.
피자를 시켰다고 하니 할머니가 좋아하신다고 한다.
맛있는 거 먹으니 아픈 것도 잊으시고 행복해하신다.
저녁엔 근방 유명한 맛집에서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해드렸다.
입맛에 안 맞으셨나 보다, 조금 남기셨다고 한다.
할머니 입맛 까다롭다.
2022.03.25 금요일
오늘은 내 연차 날이다.
우리 회사는 전달 말에 휴무를 정한다.
비밀로 했다가 뿅 하고 나타나서 회사 때려치운 척 장난치려고 했는데.. 망했다
식구들 끼니가 제일 걱정됐는데, 전날 엄마 친구가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팥죽이랑 약밥이랑 떡을 사다 주셨는데, 할머니가 좋다고 난리셨다고 한다.
점심, 할머니 식사로 장어구이를 주문했다.
이제 초인종 딩동 누르면 맛있는 거 왔다고 신나 하신다고 한다.
나는 약국에 들러 비대면 진료받은 할머니 약을 받고, 마트에서 한라봉을 한 박스 샀다.
혹시라도 힘이 없어 껍질을 못 벗길까, 플라스틱 일회용 도시락통을 사 와서 집 앞 벤치에서 껍질을 까 예쁘게 포장하고, 문 앞에 놔두었다.
그리고 첩보처럼 엄마가 강아지들에게 소독 스프레이를 뿌리고, 가슴 줄과 산책 가방을 현관에 쓰윽 내놓았다.
그리고 나는 계단 위에, 엄마는 문을 살짝 열고 강아지 두 마리만 밖에 내보냈다.
강아지들을 산책시키기 위함이었다.
한 시간쯤 산책시키고, 다시 첩보처럼 강아지들을 집에 들여보내고 난 다시 독립한 집으로 간다..
할머니가 문닫힌 현관문을 향해 말씀하신다.
이렇게 들어가지도 못하고 가야 되니 더 서운하시다고 한다.
어쩔 수 없지..
2022.03.26 토요일
할머니가 점점 아프시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앓으시고, 누워만 계신다.
힘이 없으셔서 엄마가 친구분께 부탁해서 장어로 고를 내어 드렸다고 한다.
다행인 건, 냄새를 맡지 못해 장어의 비린내를 못 맡으시고 따끈한 국물 맛으로만 드신다는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안 드셨을 것이다.
오늘은 산책 후 근처 고모집에 들러서 강아지를 목욕시켰다.
갑작스러운 목욕에 강아지가 삐져 버렸다.
엄마는 나에게 보낸다고 그 와중에 반찬을 해다가 내놓으셨다.
가져가라고 하셨는데, 반찬통으로 다섯 개쯤은 되었다.
상추 무침, 밥, 동그랑땡, 낙지볶음, 미역줄기 볶음, 조미김.
무거웠다..
혹시 전염성이 있을까 무서웠는데, 그릇도 모두 소독하고 마스크 쓰고 요리해서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근데 간을 안 보셨다고..
맛을 못 느끼신다고 아예 간을 안 봤으니 알아서 양념 다시 해서 먹으라고 하시네..
전체적으로 맛이 약했는데 낙지볶음에 불닭소스를 조금 넣어서 먹으니 맛있다!
나중에 들었는데, 진짜 엄청 아프셨는데 나 반찬 해줘야 되니까 어디선가 힘이 나서 벌떡 일어나서 만드셨다고 한다.
2022.03.27 일요일
오늘도 할머니 집에 갔다.
오늘은 마트 가서 여러 가지를 샀다.
집에서 간단히 해 먹을 만한 냉동식품과 간식거리, 빵, 콘수프 등등..
돈 썼다고 혼났다.
그리고 영광에 다녀온 내 친구가 모시송편을 사 와서 할머니 간식거리와 함께 현관에 놔두었다!
나중에 봐보니 안에 할머니께 드리는 손편지도 들어있었다고 한다.
감동ㅠㅠ
2022.03.28 월요일
할머니가 많이 아프시다.
입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인 것은, 사드렸던 한라봉은 드신다고 한다.
입이 쓰디쓰고 냄새도 못 맡지만,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감귤류의 과일은 드신다.
저녁엔 꼬마김밥과 어묵탕을 주문해드렸다.
따끈한 국물이 너무 맛있다고, 맛있어서 정신이 든다고 두 번이나 전화 왔다.
할머니는 이제 집밥이 싫으시다고 한다.
배달음식이 좋으시다고 사달라고 하신다.
2022.03.30 수요일
엄마와 아빠가 음성이 나오고, 자가격리도 해제되었다.
할머니는 아직 아프시고,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다시 입원을 해야 할까 고민이 된다.
안 좋은 생각만 든다.
할머니와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이제 벚꽃이 피고 있는데, 같이 꽃 보러 가야 하는데.
2022.03.31 목요일
할머니가 점점 좋아지신다고 한다.
하지만 식사는 좀처럼 하지 않으신다.
주문해드린다고 해도 거부하신다.
몸은 좋아지시는데, 기력이 쇠하신 것 같다.
뭔가를 드셔야 힘이 나실 텐데, 온 식구의 속만 썩이신다.
2022.04.02 토요일
아침 일찍 할머니 집에 왔다!
다른 식구들은 다들 음성이지만 후유증이 남은 상태고, 할머니도 음성이지만 후유증에 아직 앓고 계신다.
기력을 보강하는 연령보곤 단이란 게 있길래 드렸더니, 한숨 주무시더니 일어나셔서는 힘이 나신 게 느껴진다.
그 약이 좋다고 하신다.
경옥고 같은 한약이었는데, 할머니가 점점 힘이 나시고, 내가 자고 간다고 하니 더 좋아하신다.
점심땐 드시고 싶은 게 없으시다더니, 콘수프를 끓여드리니 맛있다며 두 그릇이나 드셨다.
달콤한 맛이 느껴지시는 걸까, 행복해 보이신다.
창밖을 보시면서 파릇파릇 깨어난 나무의 새싹들을 보시고, 피어난 꽃들도 내려다보신다.
할머니의 기분이 좋다.
2022.04.03 일요일
이른 새벽, 난 여섯 시쯤 일어났다.
강아지 배를 문질문질 하면서 핸드폰 보며 누워있었는데, 30분쯤 지났을까, 거실에서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목소리다!
진짜 놀라서 얼른 뛰어나갔는데, 할머니가 혼자 휠체어를 타고 나오셨다.
배에도 힘이 생기셨는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크고 또렷하다.
얼굴에 부기도 빠진 게 이제 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내가 와서 할머니가 빨리 나으셨나 보다.
일어나지도 못하셔서 침대에 겨우 앉아서 식사하시던 분이, 스스로 휠체어를 타고 나오시고 돌아다니시는 걸 보니 이젠 걱정이 없을 것 같다.
나오시자마자 잔소리를 하신다.
이거 가져가라, 저거 가져가라, 얼른 가방에 넣어라,
새벽에 눈 뜨자마자 내가 가는 날인 걸 생각하셨는지 이것저것 챙겨주신다.
말로.
저녁때쯤 갈 건데 새벽부터 잊어버리고 갈까 하나하나 챙겨가라고 알려주신다.
가방에 넣을 때까지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넣은 척했는데 들켰다.
이따 반찬 담고 넣을 거라고 할머니를 달랬다.
아침엔 내가 식사 준비를 하고, 엄마는 누워서 앓고 있었는데, 엄마가 밥을 안 먹는다니 할머니가 엄마방까지 휠체어 타고 가셔서 엄마를 깨운다.
얼른 밥 먹으라고, 일어나라고.
결국 일어나서 식구들끼리 모여서 밥을 먹는다.
할머니는 식사를 다 하시고도 식탁에 앉아서 놀다가 방에 들어가서 누우신다.
올해는 할머니와 꽃놀이를 못 가겠구나.
가봤자 근처 공원에 휠체어 끌고 가서 가까이에서 꽃들을 보는 정도였지만, 올해는 할머니가 나으실 때까지 못 나가시니 내년에 가자고 할머니와 약속했다.
다음 달쯤 되면 5월의 꽃이 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