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 번도 할아버지의 산소를 가신적이 없으셨다.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었지만, 마음 아프셔서 한 번도 가보질 못하셨다. 그동안 여러 번 같이 가시길 시도했지만, 할머니도 항상 함께 가고 싶어 하셨지만, 출발할 때쯤 되면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시고 슬퍼하시고 우시다가 결국 못 가시길 부지기수, 그렇게 20년이 훌쩍 지났다.
몇 년 전에, 할머니가 아프시기 전에 명절에 식구들이 모시고 간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차마 선산에 오르지 못하시고 아래 차에서 기다리셨다. 그리고 뇌졸중이 오셔서 계속 아프셨고, 정신마저 온전치 않으셔서 집 앞마저 나가지 못하셨다.
지난 추석 때쯤, 할머니와 근교의 공원에 산책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땐 할머니가 조금 괜찮으셔서 30분 정도 거리를 차 타고 가보았지만, 그 시간도 너무 힘들어하셔서 두 시간 거리의 선산엔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올해 설, 할머니는 점점 나아지셨고 체력도 많이 붙으셨다. 예전엔 한 시간만 휠체어에 앉아계셔도 힘들어하셨고, 바로 누워버리셨는데, 요즘은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서 놀아도 지치지 않으셨다. 올해는 갈 수 있지 않을까? 갈 준비를 하자. 가방에 할머니의 기저귀, 물티슈, 물도 챙기고 강아지들의 간식과 몸줄도 챙기고. 식구들과 할머니 모두 합하면 열명, 그리고 강아지 두 마리, 식구들 모두 부스터 샷까지 예방접종도 완료했다. 차 두대로 식구들이 나누어 타고, 뒷좌석에 할머니를 앉히고 안전벨트를 꼭꼭 매고 고향길에 나섰다. 오늘은 작은 설날, 길이 많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막히는 건 없었고, 날씨도 깨끗하고, 할머니 몸도 좋으시다.
중간중간 할머니의 상태를 체크하며, 괜찮으신지 여쭈었는데, 할머니의 신경은 감자에게 향해 있었다. "애기 편하게 해 줘라!" 창밖을 보는 걸 좋아하는 감자에게, 한쪽 어깨를 내어주시며 밖을 편하게 내다보라고 감자 자리를 만들어주셨다. 곧 어깨 아프시다며 애기를 데려가라고 하기는 하셨다..
가는 내내 초롱초롱, 할머니도 창밖을 내다보시며 휙휙 지나가는 건물들을 바라보시다가, 산이 나오면 산을 보고, 들판이 나오면 들을 보셨다. 창밖에 지나가는 바깥 풍경들은 할머니가 오랜만에 보신 풍경들, 아무것도 아닌 산이어도 이런 푸릇푸릇 산에 있는 나무들은 할머니껜 재밌는 풍경들이었다.
혹여 할머니가 힘들어하실까 걱정했지만, 전혀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할머니는 창밖을 좋아하셨고, 살짝 내린 창문에 불어오는 바람도 개운하니 좋다 하시고, 그렇게 식구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하면서 가다 보니 어느덧 영암이 가까워져 왔다. "저기! 저산!" 할머니가 멀리 보이는 산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월출산, 할머니가 고향마을에서 매일 보이던 산이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추억을 기억해내기 시작하셨다. 바위산의 자태가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잔잔하게, 매일 단단하게 깔려있었을까. 그때부터 할머니의 고향여행은 시작되었다.
영암에서 조금 가다 보면 까치내재가 있다. 지금도 그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그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 영암에서 고향마을로 가는 길목이다. 할머니와 다른 식구들은 다들 그곳에 다른 추억이 있었다. 식구들의 40년 전의 기억, 그곳에서 나무를 하면서 할머니가 뭉쳐주셨던 주먹밥을 먹었다거나,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 연수를 해주던 곳이 그곳이었다거나.. 나의 추억은 한 25년 전쯤이었다. 열 살 때쯤, 눈이 도톰하게 쌓인 날,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나, 셋이서 그 재를 넘어가던 중, 타고 가던 트럭의 바퀴가 미끄러진 것이다. 점점 뒷바퀴가 도로 아래로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고, 운전을 하시던 할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운전대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셨다. 차는 천천히 아래 낭떠러지로 밀려들어가고 있었고, 거기에서 차가 떨어지면 정말 온 식구가 죽는 거였다. 할아버지는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시며 운전대를 돌리시더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차는 무사히 다시 도로 위에 안착했고, 우리는 무사히 집에 갈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때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잊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할머니도 할머니의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까치내재를 넘어서 고향마을이 멀리서 보였다. 여기는 누가 살던 동네, 여기는 무슨 집이 있던 동네 하나하나 짚어가며 천천히, 추억을 되새겼다.
할머니와 살던 곳은 작은 시골마을이었고, 논과 밭이 많고 건물이라곤 죄다 1층뿐, 어쩌다 2층인 곳은 학교나 면사무소 정도였다. 여기가 우리 동네다. 온 식구가 그 동네에서 살았고, 그곳에 학교는 당시 국민학교 하나, 중학교 하나. 온 식구가 그 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선후배 사이 이기도 하다. 식구들이 보이는 가게들을 불러본다. 여기 중학교! 여기 사진관! 여기 할아버지가 다니시던 이발소! 여긴 소방서 자리, 여기는 식육점, 슈퍼, 약국 등등등.. 모두의 추억이 곧 나의 추억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에겐 시집와서 네 명의 자식을 낳고 키운 마을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그곳을 기억하시는 것 같았다. 흥분해서 말씀은 잘 못하셨지만 창밖 풍경을 보시며 반가워하셨고, 추억을 기억하셨다.
고향마을에서 선산까지는 5분 정도, 더 차를 타고 가야 한다. 가는 길에 있는 옛날 우리 논, 우리 밭, 할머니가 젊었을 적엔 할머니가 저 풍경 속에 있었다. 그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마늘을 심고, 거름을 뿌리고, 거두었다. 난 그 옆에서 잡초나 뽑으며 노는 뽀시래기였다.
선산에 도착했다. 산아래, 경사가 심한 곳이라 휠체어로 가기엔 위험했다. 나는 할머니와 근처에서 산책이나 하고 놀겠다며 고모와 함께 길 건너 마을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거기서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남동생이 나를 부른다. 오라고 한다. 우선 할머니와 갔더니, 친 남동생과 친척 남동생 둘이서 할머니를 모시고 올라가겠다고 한다. 걸어서 올라가면 2분이면 오르지만, 휠체어를 끌고 가기엔 위험한데 괜찮을까.. 그래서 건장한 남동생 둘이 다시 내려왔단다. 남동생 하나가 휠체어를 잡고, 양쪽에서 나와 친척동생이 한 번 더 잡고 올라갔다. 다행히 길은 시멘트길이라 오르는데 힘든 건 아니었다. 경사가 심해서 휠체어를 끄는데 더 체력이 들었을 뿐. 올라가니 나만 숨을 헉헉대고 있었다. 산소 바로 아래까지 올라갔지만 길 끝은 무성한 풀들이 사는 흙길, 더 이상은 휠체어를 끌고 갈 수 없다. 그곳에서 할머니의 휠체어가 혹시나 굴러갈까 옆으로 세워두고 브레이크를 걸어두고, 난 할머니 옆에 휠체어를 잡고 지키고 서있었다.
할머니의 시선 끝엔, 남편의 묘가 있다. 그동안 그토록 마음 아파서 갈 수 없었던 곳, 어떤 마음일까. 처음엔 식구들과 모두 가고 나도 장난치며 웃으며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점점 그곳이 생각나셨나 보다. 쓸쓸한 마음에 한동안은 말이 없으셨다. 막상 와보니 오히려 슬픔보단 홀가분해 보이셨다. 드디어 왔다. 잠시 눈물을 흘리시다, 잠시 웃으시다 나는 할머니를 지키며 얘기하며 놀고, 다른 손주들도 한 명씩 번갈아가면서 산소와 할머니께 왔다 갔다 했다. 식구들이 성묘를 하고, 나도 절을 해야겠단 생각에 동생 중 한 명을 불러서 할머니를 지키고 있으라고 한 후, 혼자서 자박자박 올라가 절을 했다. 그리고 뒤돌아 할머니를 보는데, 할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계셨다. 할머니께 뛰어가 앞에서 덩실덩실, 아기처럼 춤을 추었다. 할머니가 보시며 웃으신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땐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괴상스럽게 춤추며 놀았는데, 그것을 참 좋아하셔서 기분이 안 좋으실 땐 나보고 춤을 춰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의 춤을 보시곤 웃으셨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따뜻하다. 추억이 슬그머니 올라오며 그 풍경 속의 나를 떠올린다. 할머니도 그러셨을 거야. 돌아가는 길은 할머니는 너무 기분이 좋아 박수를 치며 노래도 부르시고, 가는 내내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옛날 노래를 틀어놓고 다 같이 노래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산 중턱의 오래된, 큰 건물이 보였다. 거긴 불티재라고 했다. 식구들끼리 예전에 거기는 카바레였다느니, 콜라텍이었다느니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저기서 춤추고 놀았어"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예전에 모임에서 춤을 추신적이 있다. 지르박이나, 부르스 같은 사교댄스를 추셨다. 그때 할머니가 지르박을 배우고 싶다고 하셔서, 학원을 보내드린 적도 있다. 식구들 아무도 기억 못 했는데, 할머니는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 기억을 말씀하셨다. 점점 몸도, 정신도 좋아지신다.
그날 오는 길에 환하게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 이렇게 깨끗하게 해 줘서 고맙소잉" 산소를 잘 관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오는 내나 할머니는 너무나 만족해하셨고, 기분 좋으셨다. 피곤한 기색,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늘의 기억이 할머니께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모두가 만족하는 여행. 죽은 남편의 산소를 가는 길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살았던 고향을 가는 여행. 내년엔 선산을 오르는 그 길을 걸어서 올라가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손은 내가 잡아드릴게요.